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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Dec 07. 2024

녹색 고양이와 판도라 상자 (5)

연말&크리스마스 특집 단편소설

녹색 고양이와 판도라 상자 (5)



나는 검지로 스핑크스를 찌르듯 몰아세운다. 실제로 찌르는 건 아니고 멀찍이 떨어져 찌르는 시늉만 한다. 녀석이 하품하며 그런 나를 비웃는다. 도대체 고양이가 인간을 비웃다니 말이 되는가. 이 자식은 고양이가 아니라 녹색 악마이다. 간교하게 미미를 홀린 게 틀림없다. 이런 자식은 혼쭐을 내놔야 한다.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부터 내가 내는 수수께끼를 풀면 미미에게 한 너의 행동을 모두 용서해 줄게. 하지만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당장 나와 함께 너의 애인을 찾으러 나가야 해. 알았지? 내가 찍어주는 고양이를 따라가라고. 알았지?      


수수께끼라니, 거참 웃기는 소리네, 하고 스핑크스가 눈으로 말한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켠다. 그리고 미미가 해준 이야기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스핑크스의 전설을. 마침내 수수께끼를 낸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도 네 발로 걷고, 저녁에도 네 발로 걷는 짐승 중 가장 멍청하고 혐오스러운 짐승의 이름이 뭐지?      


스핑크스는 휴식이나 취하려는 듯 그윽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다가 미미가 오면 슬쩍 빠져나갈 참이다. 얄밉고 괘씸한 놈. 나는 외쳤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 봐, 말해 봐! 오 초 주겠어. 영어로 말해도 된다. 딱 오 초야. 카운트다운, 자, 시작! 레디, 고우!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제로. 땡.      

내가 전생에 쥐였을지는 몰라도 너는 날 무시할 수 없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조금 치사한 것 같지만 어쨌든 내가 이겼다고 선언한다. 내가 이긴 건 분명하다. 스핑크스는 내가 낸 수수께끼의 답이 별로 궁금한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나는 예의상 놈에게 답을 말해 준다.      


정답은 녹색 고양이 스핑크스야, 알았지.      


십오 분 뒤에 나는 수수께끼의 정답을 끌어안고 집을 나선다. 오후 아홉 시 반이다. 아파트의 상가 입구까지 걸어가면서 주변을 살핀다. 보도블록과 텅 빈 놀이터에는 하얀 눈이 수북하게 쌓여가고 있다. 여기저기 꾸며진 화단과 가꾸어진 나무들 위에도 눈이 쌓인다. 오렌지색의 가로등 조명이 어두운 하늘에서 춤을 추며 떨어지는 눈을 비춘다. 우산을 펼치고 걷는 사람도 있고 우산이 없어 옷깃을 세운 채 그냥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스핑크스에게 애인을 만들어 주기 위해 놈을 데리고 나왔지만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내가 처량한 기분이 든다. 이전에는 이곳을 걷다 보면 못생긴 고양이 서너 마리는 쉽게 마주쳤다. 그런데 지금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내리기 때문일까? 눈이 내리면 아파트 구석구석을 거닐던 고양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주변 여기저기를 살피며 걷는다. 나의 양쪽 팔 안에 안겨있는 스핑크스가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린다. 공기가 너무 차가워 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둘 다 감기에 걸릴 것 같다. 스핑크스의 숨결이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다.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있다. 아니 일산화탄소던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어떤 종류의 기체 분자를 내뿜고 있다. 나도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잘한 편이다. 그래서 그 정도 상식은 안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날 뿐이지.     


스핑크스는 갑작스러운 외출에 대한 놀라움과 피로한 기색도 함께 내뿜는 것 같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마스크를 쓰고 나왔지만, 숨이 가쁘고 가쁘다. 커다란 몸집을 지닌 스핑크스를 안고 움직이는 게 무척 힘들다. 스핑크스도 답답한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내 팔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덩치가 큰 놈이라서 붙들고 있기 힘들다. 이내 스핑크스는 내 팔에서 훌쩍 빠져나온다.      


안 돼!     


나는 소리쳐서 놈을 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놈은 눈 내리는 아파트 단지의 보도블록 위로 내려 재빨리 달린다. 이리 와, 하고 나는 외친다. 하지만 놈은 내 말을 무시하고 빠른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나도 허겁지겁 달린다. 숨이 차다. 잠깐만 기다려, 하고 외쳐보지만 소용없다. 스핑크스는 순식간에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눈 내리는 큰길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나 역시 놈을 쫓아 달린다. 어둡고 하얀 세상 속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경계를 지을 수 없는 모호한 혼돈의 도입부를 지나     


어둠의 거리로 

눈 내리는 하얀 거리로      

발로 세상을 두드리며 빠르게 달린다


모두가 

숨차게 달린다.      


미지의 혼돈 속으로

고대의 신탁과 예언 속으로     


달리는 자여

너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계속) 다음 편은 12/9 월요일 아침에 이어집니다. (월 수 금 토 연재)


* 대문 그림 <판도라의 상자>는 이탈리아 태생의 영국 화가 찰스 에드워드 페루기니의 1893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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