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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Dec 04. 2024

녹색 고양이와 판도라 상자 (3)

연말&크리스마스 특집 단편소설


연말&크리스마스 특집(?) 단편소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소설을 써도 일상이 심심하신 분들

- 연말&크리스마스에 별로 할 일 없으신 분들

- 이집트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들


연재 : 월 수 금 토


녹색 고양이와 판도라 상자 (3)



오늘도 미미는 늦는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 들어올 것이다. 그래서 심심하다. 미미는 테마파크 연말 행사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아이돌에 버금가는 인기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미미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희망을 찾아주는 뮤즈이며 고달픈 삶을 위로하는 여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래서 미미를 만나 상담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다고 한다. 테마파크의 배불뚝이 정이수 상무도 미미의 추종자이다. 저녁 식사에 미미를 초대하여 이집트 향신료와 해산물이 가득한 특별요리를 대접한다고. 어제는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미미에게 질문을 했다고 한다.      


미미 씨, 홍보팀에서 자꾸 딴지를 겁니다. 무식한 누리꾼들의 무식한 댓글 질문이 매일 올라온다는 거예요. 미미 씨의 코너 명칭이 왜 <판도라의 상자>인지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랍니다. <이집트 공주 아낙수나문의 점성술>이라고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주장도 있다고 해요. 미미 씨가 설득력 있게 직접 설명하는 영상을 찍어 올리자는 의견이 홍보팀에서 나오고 있어요.


미미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상무님, 태초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거기서 튀어나온 불행과 고통이 모두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세요? 바로 우리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스며들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판도라 상자를 마음이라는 심연에 품고 있는 거예요. 이 마음 상자 안에 불행과 고통이 담겨 있는 거죠.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판도라라는 마음의 상자를 열어서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 주는 주술사입니다. 그 자리에 희망이 대신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저의 역할이에요. 전생에서도 똑같은 일을 했어요. 그리고 홍보팀 사람들은 머리가 참 나쁘네요. 판도라의 상자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신화랍니다. 아낙수나문보다 판도라의 인지도가 훨씬 높아요. 그리고 이건 비밀이지만 판도라의 후손이 아낙수나문 공주, 바로 저랍니다. 정이수 상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미의 빈틈없는 설명을 또박또박 메모했다.


그런데, 사실 판도라를 고집하는 이유는 따로 있어. 미미는 내게 또 다른 비밀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이 세상에 환생한 것은, 진짜 판도라의 상자를 찾기 위한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판도라 상자? 그건 뭐야? 내가 물었더니 미미가 빙긋 웃었다. 진짜는 진짜지 뭐겠니. 태초에 진짜 판도라의 상자가 있었다고! 그건 이렇게 생겼어. 미미는 종이 위에 작은 상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옛날 옛날 태초에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어. 처음에는 남자만 있고 여자는 아직 없었지. 그때 제우스라는 신이 여자를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동생에게 보냈어. 이 최초의 여자가 바로 판도라야. 하늘이 빚은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갔어. 그의 형 프로메테우스는 직감적으로 판도라를 멀리하라고 경고했지만, 동생은 그 말을 듣지 않았어. 볼수록 알쏭달쏭한 판도라를 사랑하게 된 거지. 원래 사랑이 그런 거야. 그래서 아내로 맞아들였어. 최초의 결혼 생활이 시작된 거지. 최초의 신랑 에피메테우스는 최초의 신혼집인 자기 저택에 상자 하나를 지니고 있었어. 인간에게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상자에 넣어 두었던 거야. 그런데 최초의 신부 판도라는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 궁금했지. 어느 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를 열어본 거야. 안을 들여다보았지. 갑자기 상자 속에 봉인되었던 질병, 고통, 상처, 아픔, 두통, 우울, 의심, 주정, 질투, 멍 때리기, 뒤끝 등 온갖 불행이 전부 튀어나와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기 시작했어. 판도라는 너무 놀라서 뚜껑을 덮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지 뭐니. 그 바람에 상자 속에 있던 것들이 거의 모두 제 세상 만난 새처럼 훨훨 날아가 버렸어! 딱 하나, 맨 아래에서 머뭇거리다가 가출하지 못한 게 딱 하나 남아 있었어. 그게 바로 '희망'이야. 진짜 희망, 레알 희망이지. 가짜 희망, 페이크 희망이 아니고! 인간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 희망!  

    

미미는 신화를 말해 주면서 판도라의 상자를 세심하게 그렸다.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게 희망만 담긴 그 상자야? 미미는 고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런 모양의 상자를 보면, 무조건 내게 가져와야 해. 상자 바닥에는 두 번째 뚜껑이 있는데, 바로 그 안에 희망이 갇혀 있어. 그것을 열면 나의 사명이 끝나는 거야. 세상은 희망을 품게 될 것이고, 이집트 공주라는 내 역할도 끝나는 거지. 나를 보좌해 온 너도 영광일 테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상자를 찾고 나면 그 뒤에는 뭘 하려고? 그러자 미미가 나를 보며, 신비하게 피식 웃었다. 바보야, 그 뒤에는 너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러니까, 그때까지 꾹 참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알았지!     


나는 미미의 사명 의식과 인류애가 담긴 비전에 감동했다. 아름다운 나의 애인 미미가 엄청나게 훌륭한 일을 한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 이제 밤마다 미미가 마련해 준 거실의 침낭에 누워 미미가 속삭여 준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리곤 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희망을 찾아주는 여신, 미미가 판도라를 여는 거룩한 순간을 상상한다. 오 내 사랑 미미,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 나의 사랑, 나의 여신, 나의 미미

   그대 손길이 인류의 희망이어라

   그대 숨결이 나를 잠들게 하라


혼자 지내는 토요일 오후는 참으로 무료하기만 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오전의 미미를 추억한다. 어제의 미미와 한 달 전의 미미와 육 개월 전의 미미도 추억해 본다. 하지만 오전의 미미가 가장 생생하고 예쁘다. 미미의 미소, 짙은 눈썹, 아름다운 눈, 우아한 손짓, 고결한 걸음걸이가 떠오른다. 바로 저기에 서서 기지개를 켰지. 향긋한 사향 내를 풍기며 침실에서 걸어 나왔지. 그런 추억에 잠기면 나는 전혀 움직이질 못한다. 눈앞에 미미가 있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바보스럽다는 걸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청소와 빨래도 다 해버려서 딱히 다른 할 일도 없다. 오로지 미미를 향한 그리움만 가득한 순간이다. 미미는 내가 직접 만든 돈가스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을까? 오늘 저녁 식사는? 또 배불뚝이 상무랑 함께? 모든 게 궁금하다. 이선희라는 가수가 부른 <알고 싶어요>라는 미미의 애창곡이 흘러나온다. 내 심장은 터질 것 같다. 내일은 미미의 허락을 받아 테마파크를 꼭 직접 방문하고 싶다. 창밖을 보니 흰 눈이 내리고 있다. 쏟아질 기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려나. 그러면 좋겠다. 하지만 미미는 크리스마스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이 믿는 여신 이시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 크리스마스는 이교도의 축제라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미미를 위해 뭔가 선물을 준비하고 싶다. 저기, 녹색 고양이 스핑크스가 미미의 침실에서 기어 나온다.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며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계속) 다음 편은 12/6 금요일 아침에 이어집니다.


* 대문 그림 <판도라의 상자>는 이탈리아 태생의 영국 화가 찰스 에드워드 페루기니의 1893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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