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크리스마스 특집 단편소설
연말&크리스마스 특집(?) 단편소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내 전생의 천적인 스핑크스는 언제나 거만하고 도도하다. 미미의 이집트 공주 시절을 기억하는 눈초리로 나를 멸시하며 멀뚱멀뚱 쳐다보곤 한다. 나와 함께 있던 미미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바로 내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붉은 눈을 치뜨고 발톱을 세우거나 그르릉 소리를 지르며 나를 위협한다. 나는 너 따윈 한 개도 겁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무시하는 척 하지만, 내심 불안하다. 언제 놈이 펄쩍 뛰어올라 내 얼굴을 할퀴고 도망칠지 모른다. 목을 물어뜯을지도 몰라 소파에 마음 편히 눕지도 못한다. 청소를 하다가 놈이 나타나면 어깨를 세우고 녹색 유리 테이블 위에 있는 여행잡지를 만지작거린다.
그렇게 스핑크스를 무시하면 놈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내 하품을 한다. 그러다가 꼬리를 흔들곤 슬그머니 미미의 침실로 사라진다. 나는 미미의 허락 없이 그 신성한 침실에 들어가지 못한다. 딱 두 번 들어가 봤다. 미미가 열병에 걸려 누워 있을 때 맑은 죽을 만들어 들어간 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10분 뒤에 미미가 그릇을 치워달라고 했을 때 들어간 게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녹색 고양이 스핑크스는 자기 마음대로 아무 때나 장미향기 가득한 미미의 침실을 들락거린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부아가 치민다. 숯불에 떨어진 고기 살점을 새까맣게 태우는 화염이 내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심장을 지글지글 태우며 마구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너는 울지도 않느냐
가출하는 법도 모르는 놈아
너의 때 끼인 발톱
고요한 달빛을 할퀴는구나
내 사랑 장미꽃 침실
들여다보며 들여다보며
걍 내가 참는다
보름 전부터 스핑크스와 둘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미미가 심각하게 바쁘기 때문이다. 미미는 어느 대형 실내 테마파크에 초청되어 한 달 동안 열리는 이벤트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즌이라 테마파크가 성수기이다. 그래서 늦은 시각까지 야간 개장을 한다. 미미는 놀이공원의 직원이 아니고 명동에 자신의 개성을 살린 멋진 점성술 가게를 가지고 있다. 미미는 영어도 하고 일본어도 하고 중국어도 한다. (이집트어도 당연히 할 거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점성술가이다.
그런데 테마파크 측에서 한 달 전에 미미를 방문했다. 배가 볼록한 테마파크의 정이수 상무이사가 직접 미미의 가게에 달려와 미미의 두 손을 꼬옥 잡으며 제발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이번 연말 이벤트 행사가 성공하면 미미와 장기계약을 맺겠다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고 한다. 배불뚝이 정 상무이사는 미미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며 둥근 머리를 공손하게 숙였다. 결국 미미는 실내 테마파크의 회전목마 옆에 신설된 <판도라의 상자>라는 점성술 코너를 맡는 걸 허락했다.
테마파크 입구에는 미미의 이집트 공주 시절 모습이 그려진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미미의 신비한 눈과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우아한 자태가 멋지게 어울렸다. 판도라 상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인데, 왜 이집트 공주가 그걸 여는 거냐,라고 홍보실 팀장이 딴지를 걸었다. 하지만 미미의 말을 절대 숭배하는 정이수 상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판도라 상자가 이집트 공주 말고 과연 누구에게 어울리겠냐며 호통쳤다. 이집트는 인류 문명의 발원지이기에 행방불명된 판도라 상자가 당연히 그곳으로 흘러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하여 홍보 포스터는 테마파크의 전면 광고로 승천하여, 도심을 달리는 시내버스에도 부착되었다. 나는 거리를 달리는 그 광고를 볼 때마다 내가 미미의 애인이라는 게 뿌듯하고 황홀했다. 직장동료들에게도 자랑했다. 그들은 광고에 등장한 미미의 모습을 보더니 크게 감탄했다. 이구동성으로 모두 외쳤다.
우와, 완벽한 클레오파트라 여왕님이시네!
이윽고 그들은 나를 진정한 동료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 같다. 요즘은 아침마다 내 어깨를 치며 친근하게 군다. 클레오파트라 여왕님은 밤새 무사하시냐? 코는 안녕하시냐? 인사치고는 좀 야릇하고 이상하다. 어쨌든 내게 살갑게 구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그들은 나의 처우를 제대로 개선해줘야 한다는 눈빛을 나누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곧 정규직 자리를 내게 제안할 것 같기도 하다. 아무렴, 당연히 그래야지.
(계속) 다음 편은 12/4 수요일 아침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