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핑크스는 거실을 어슬렁거리며 하품을 한다. 심심한 모양이다. 내게 시비를 걸 기회를 다시 엿보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다지 위협적인 표정이 아니다. 어쩐 일인지 모르겠다. 사귀어 보자는 건가? 그럴 리가! 심심하다고 나를 가지고 한 번 놀아보겠다는 심보가 분명하다. 이럴수록 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모른 척 가만히 내버려 둔다. 눈을 감는다. 문제는, 너무 오래 눈을 감고 있으면 오히려 내가 답답해진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눈을 뜬다. 놈이 어느새 내 발 바로 앞에까지 진군해서 나를 올려 보고 있다. 저리 가! 나는 오른발을 들어 스핑크스를 밀쳐낸다. 놈은 테이블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다시 내 앞에 와서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고개를 갸웃한다. 뭘 어쩌란 건지. 야, 눈이나 구경해. 너 전생에 이집트에서 살았다며? 이집트에서 눈 내리는 거 한 번도 못 봤을 거잖아. 저기, 눈 봐, 눈, 하얀 눈이라고.
나는 스핑크스가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베란다 창문을 가리킨다. 스핑크스는 녹색 유리 테이블 위로 훌쩍 뛰어올라 그 위에 앉는다. 귀를 쫑긋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는 놈을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그래도 놈은 전혀 기죽지 않는다. 놈의 털은 약발 떨어진 형광펜처럼 흐릿한 녹색이다. 야아, 너 정말 징그럽구나, 하고 내가 놀린다. 놈은 입을 크게 벌리더니 다시 하품한다. 혀를 내밀며 입맛을 다신다. 야, 너, 혀는 나처럼 붉은색이네. 나는 내 혀를 쑥 내밀어 스핑크스에게 보여 준다. 순간 놈이 뒤로 물러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를 지켜본다. 동공이 두 배는 커지는 것 같다. 갸르릉 소리 낸다. 나는 얼른 혀를 입안으로 당긴다. 놈이 내 혀를 할퀴면 큰일이다. 그럼, 직장동료들이 뭐라고 날 놀리게 될지! 클레오파트라 여왕님이 아름다운 손톱으로 내 혀를 길게 잡아당겼다는 둥 할 게 분명하다. 손톱으로 당겼다고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미미는 절대로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여자가 아니다. 첫인상은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알고 보면 마음이 봄처럼 따뜻한 여자다. 이집트에서도 공주였지만 겸손했다고 하잖아. 자신은 늘 가난한 서민과 노예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하잖아. 찬란한 자신의 미모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사람들은 모른다. 나도 미미를 흉내 내 거실에서 아침마다 초연한 눈길로 체조한다. 체조하면서 기도한다. 미미 그대를 위해 오늘도 건강한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해 주소서! 미미는 자신의 미모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고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일에 관심이 많다. 나 역시 나의 용모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 백성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는 미미에게 봉사한다는 경건한 마음 하나로 살아간다. 미미가 내가 자주 무관심한 것도 이해한다. 희망이 담긴 판도라 상자를 생각하면 잠이나 제대로 자는지, 걱정이다. 이처럼 훌륭한 애인을 잔인한 여자로 오해하게 만들면 곤란하다. 혀를 다쳐서 직장에 가서는 안 된다. 나쁜 인상을 주면 나의 정규직 전환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다시는 스핑크스 앞에서 혀를 내밀지 말아야겠다.
아니, 그것보다 스핑크스가 하루빨리 미미의 곁을 떠나게 할 수는 없을까?
갑자기 아이디어가 번득, 하고 머릿속에 떠오른다. 스핑크스에게 애인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그렇다. 이놈도 이제 성숙한 나이가 되었으니까 애인을 만들어 주면 애인을 만나러 자주 나가게 될 것이다. 잘하면 애인을 따라 아주 멀리 가버릴 수도 있다. 왜 그런 생각을 좀 더 일찍 하지 못했을까? 내가 한심하다. 너무 봉사에만 전념한 탓이다. 하지만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스핑크스의 애인을 찾아주면 된다. 만들어 주면 된다!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스핑크스를 데리고 산책을 자주 가면 되지 않을까. 미미는 스핑크스를 절대로 산책 데리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스핑크스가 매일 집 안에만 머물고 있었으니 연애하고 싶어도 상대를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미미의 침실이나 들락거리는 것이다. 나를 질투심에 빠지게 하는 건, 꼭 놈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이대로 여기에 이놈을 두면 놈은 자기 애인이 바로 미미라고 생각을 자꾸 강화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그리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미미가 침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을 때, 나는 미미를 위한 돈가스 도시락을 차리고 있었다. 미미는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그 길고 아름답고 우아한 몸매를 위로 올려 이집트 요가의 첫 번째 동작인 <일상의 활력을 되찾는 기지개>를 시작했다. 바로 그때 스핑크스가 미미의 침실에서 기어 나오더니 미미의 발목에다 자신의 등을 비벼대었지. 그동안은 그런 동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매일 반복되는 광경이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스핑크스의 음흉한 동작은 일종의 애무가 아니었나 싶다. 미미는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스핑크스를 안더니 놈의 볼에다 키스하곤 하지. 그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에서 다시 돈가스가 기름에 지글지글 튀겨지는 소리가 울린다.
그 끔찍한 기억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니면 녹색 고양이의 흉측한 털 때문인지 몰라도 갑자기 기침이 나온다. 둘 다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절박한 심정을 느끼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천식 흡입 치료제 벤톨린을 찾기 시작한다. 가방을 뒤적였으나 거기에 없다. 옷걸이에 걸어 둔 재킷 안쪽 호주머니에서 벤톨린을 발견한다. 그걸 꺼낸다. 입을 벌리고 흡입구를 댄 채 떨리는 손으로 분무기 버튼을 눌러댄다. 한동안 잠잠하던 천식 증세가 다시 발동하다니, 불길한 징조가 아닐 수 없다.
저리 가, 저리 가.
나는 녹색 고양이 스핑크스를 향해 그렇게 외친다. 스핑크스는 발톱을 세우며 물러나길 거부한다. 녹색 유리 테이블 위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나는 벤톨린을 두세 번 더 흡입한다. 잠시 뒤, 좁아졌던 기관지가 다시 확장되면서 쌕쌕하던 숨소리가 멈춘다. 나는 정수기로 가서 따뜻한 물을 한 잔 받아 마신다. 그리고 몸을 돌려 스핑크스를 노려본다. 놈은 어느새 내가 앉아 있던 소파 위로 올라가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니 화가 더욱 치민다. 당장 놈의 애인을 찾으러 나가야 한다! 들고양이에게! 동시에 유부녀 고양이라면 더 좋겠다. 불륜이나 저지르다가 산적 같은 남편 고양이에게 혼나라지. 당장 놈을 데리고 산책을 떠나야 한다. 폭설이 내린다 해도 당장! 너도 외롭고 매서운 추위 맛을 좀 봐야 해!
(계속) 다음 편은 12/7 토요일 아침에 이어집니다.
* 대문 그림 <판도라의 상자>는 이탈리아 태생의 영국 화가 찰스 에드워드 페루기니의 1893년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