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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Feb 09. 2024

상실의 시대

우린 모두 어딘가 뒤틀리고, 비뚤어지고, 헤엄도 제대로 못 쳐서 점점 물속에 가라앉는 인간들이야.
-상실의 시대-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마냥 행복한 감정이 떠오르는 이유는 그 시절을 잘 헤쳐왔기 때문이다. 그땐 회복 탄력성이라는 단어가 무색한 체력과 어딘가 무작스러운 면도 갖추고 있었다. 대학 동기들을 별 이유 없이 미워했다가 가장 의지하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잔디밭 위에서 발레를 하기도 원숭이 흉내를 내기도 했다. 동기 몇 명이서 간 유럽 여행 중 한국행 비행기에서 '꼭 런던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말을 장난스레 뱉었는데, 코웃음을 치던 동기의 그 코를 좀 납작하게 해주고 싶다는 오기에 겁도 없이 런던 워킹홀리데이 길에 올랐다. 

 런던에서의 삶은 여행만큼 윤택하지는 않았다. 고된 일상과 외로움이 겹쳐 방 문을 꾹 닫고 울 때면 옆방의 친구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옆에 있을 테니까 말하고 싶으면 말해."

 하지만 나는 결코 문을 열어주는 법이 없었다. 파티도 하고 축구도 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문은 꼿꼿했고 그 시절을 기점으로 내 마음속에 있던 참 여러 겹의 문을 인지했다. 대학 동기 그리고 어언 20년을 함께한 중학교 동창의 말이 떠올랐다. 프로 커터. 인간관계에 크게 연연하지 않거니와 어느 지점 이상으로 가까워지기가 힘들다는 첨언이었다.

 문은 견고했다. 문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나는 헤프게 웃을 수 없었고 길거리에서 고성방가 하기는커녕 춤을 출 수도 없었다. 우울증의 시발은 여기서부터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연한 존재가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 무기력함은 조금씩 새어 나와 고이고 쌓이다 터지거나 폭발한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와타나베는 친구 기즈코의 자살 소식을 접한 뒤 죽음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기실 죽음은 항상 삶과 동행하는 것이었음에도 죽음을 인식하고 그 존재가 무거워짐에 따라 삶도 둔해지기 마련이다. 와타나베는 그 여파로 외로움에 허덕였지만 사실 돌아가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기즈키와 나오코가 있던 열일곱 살로, 그때의 모습으로.

 적어도 나는 그랬다. 다시금 발랄하고 명랑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가려 하면 할수록 우리의 열일곱은 까마득해졌고 우울은 깊어질 뿐이었다. 바꿀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게 한걸음 내딛는 용기가 절실했다는 사실은 나오코가 찾던 깊은 우물을 나온 뒤에야 깨닫게 됐다.


 도서를 읽으며 작금의 청년이 떠올랐다. 지나친 SNS의 여파로(타인과 본인을 도를 넘게 비교하며) 어쩌면 삶의 부정적인 면을, 공평하지 않고 치열하며 더럽게 치사하다는 것을, 무겁게 느끼기 시작한 듯하다. 사실 삶은 기원전부터 부정적이기도 긍정적이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는 과도하게 냉정하며 본인에게는 가혹하다. 2024년 트렌드가 육각형 인간,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인간이라는데 인성, 경제력, 체력, 외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란다. 엄마 친구 아들/딸이 정녕 꿈이 돼버린 지금의 청년은 어딘가 기묘하다. 기성세대를 꼰대라 지칭하며 깎아내리는 게 엊그제 같았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투영하고자 한 것을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다니. 

 나도 여전히 무겁긴 하다. 인스타그램 하지 말아야지, 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운동하면서 생기는 잠깐의 틈엔 꼭 휴대폰을 쥐고 뭔가를 보고야 만다. 최근에는 모르는 사람이 올린 게시글은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보고 싶은 계정만 팔로우해 그들의 스토리와 게시글만 본다. 그러다 보면 역시 SNS에서 볼만한 게시글은 동물 게시글이 유일하다는 걸 여실히 깨닫는다. 안 하는 게 으뜸이지만 안 할 수는 없으니 제대로 조절하는 게 필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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