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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Aug 26. 2024

8월 22일

 흐린 하늘에서 비가 내리진 않았고 충분히 밝았으나 해가 뜨지는 않았다. 요즘 날씨는 하나로 정할 수 없다. 맑지도 흐리지도 비가 오는 것도 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에어컨 바람이 부는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비가 뜨문뜨문 내리긴 했다. 와이퍼가 속도를 달리하며 움직이길 반복하다 아주 멈출 때도 있었다. 우산을 챙겼지만 들고 내리고 싶지는 않았고 비가 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공영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상습 불법 주차 구간을 한 번 지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해변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공짜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어렵다. 여간 쉽게 자리가 나는 곳이 아니라 기대하진 않았는데 내가 갈 때는 꼭 한 자리씩 있었다.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더욱 공영 주차장을 사용해도 무방했을 테지만 돈이 좀 궁하기도 했다.

 지갑, 휴대폰, 키와 우산까지 챙겨 조금 걸어가는 중에 비가 내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우산을 펼쳤고 어딘가 젖을 정도는 아니라 기분이 좋았다. 이내 빗줄기가 거세졌을 때,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그 후 어느 카페로 들어갈지도 정하지 못했을 때, 가장 신경 쓰이던 건 신발이었다. 신발장 앞에서 샌들을 신을지 운동화를 신을지 한참을 고민하다 운동화를 골랐는데 마침 그 운동화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발가락을 잔뜩 움츠려 양말만은 지키려고 했으나 운동화는 처참한 꼴이 됐고 걸을 때마다 흡수한 물을 내뱉어 양말로 밀어 넣었다. 이런 꼴을 감내하면서까지 봐야 했던 건 광안리였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광안대교가 생긴 뒤부터 광안리는 문득 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 나이에 광안대교가 생긴 것인지 광안대교 때문에 광안리가 그런 곳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오늘도 해변에 선 순간부터 가장 눈에 띈 것은 광안대교였고 광안대교는 아직 정채가 심하지 않았다. 차가 달리는 풍경은 생각보다 적막했다. 빠르게 회전하는 고무바퀴와 아스팔트가 마찰하며 생기는 소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 자동차가 움직이는 소리. 그런 것들을 빼고 나니 자동차는 정말 별 거 아니었다.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을 뚫고 큰 파도가 치고 있었다. 큰 파도를 보거나 맑은 날이거나 오늘처럼 광안리가 보고 싶은 날이면 파도를 가르고 싶은 욕심이 셈 솟는다. 파도를 타다 과감하게 사이드를 가르는 날렵함도 없는 주제에 꼭 그런 게 하고 싶어 진다.

 배구나 서핑도 주짓수도 헬스도 기실 내가 하는 모든 취미 활동은 타의로 시작했다. 학교 사회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였으면, 자유로운 것처럼 보였으면, 강해 보였으면, 몸이 좋아 보였으면. '보였으면'으로 시작했던 취미를 꾸준히 하게 됐고 그중 서핑이 유일하게 '하고 싶은' 취미다. 배구나 주짓수나 헬스는 일상이지만 서핑은 일탈이기 때문이리라. 하고 싶다고 가고 싶다고 매일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다 보니 더욱 소중한 것일 수도 있고.

 광안대교가 훤히 보이는 카페에 잠시 앉아 양말과 신발을 말렸다. 예보를 보니 비는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다시 맑아질 예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트북을 들고 와 좀 오래 앉아 있을 걸 하고 후회하다가도 오늘은 딱 여기까지가 정해진 운명 같아 십 분만, 십 분만 하며 앉아 있었다.

 비가 그치고 15분 남짓 걸어가는 길에 이번에는 비가 아닌 땀으로 흠뻑 젖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에어컨을 강풍으로 틀고 내비게이션을 틀어 집으로 가는 길을 검색했다. 파랗고 노란 경로에 다소 안심했다. 그때 익숙한 전화번호가 휴대폰 화면에 떴다. 원이가 입원한 동물병원이었다.

 "원이 어제 수술 끝난 뒤에 밥도 잘 먹었고 소변도 봤습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원이가 처음 온 날을 회상해 본다. 아직 젖도 떼지 않고 데려 온 바람에 새벽에 일어나 분유를 먹였던 적이 있었다. 그 후 군대에 있는 몇 년을 제외하고 산책과 원이 보호는 내가 전담했다. 귀찮은 순간이 태반이었다. 누워 있으면 와서 만져달라고 귀찮게 하고, 장난감 던져 달라는 요구는 끝이 없고, 산책하는 시간이 되면 산책하자고 낑낑, 손님이 오면 짖기 바쁘고. 그렇지만 실컷 달리고 난 뒤에 혀를 내밀며 헥헥거리는 모습 하나만으로 미워할 수 없는 게 강아지였다.

 그러다 독립하게 됐고 강아지는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는데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하루 종일 나만 기다리는 강아지만 생각하면 애가 타고 내 자유를 뺏기는 것 같아 싫었다. 내심 든든한 면도 있었다. 캄캄한 집,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하고 있으면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날 때가 있다. 그때 원이가 조용히 내 곁에 누워 있으면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겨울에는 나름 난로 역할을 하기도 하고.

 광안리에 가고 싶었던 게, 서핑하고 싶었던 게 그쯤이었던 것 같다. 종양을 발견하고 간단한 수술이 아니라 강아지가 겪을 고통도 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부터 잇몸이 붓고 머리가 아팠다. 잘 회복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긴 하지만 걱정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우선 집으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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