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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Jan 21. 2023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남은 건 정말 볼품이 없더라






이미 실패와 좌절을 예감한 고백이 정성스러울 리 없었다. 내 고백에는 굵고 빨간 선이 그어져 있었다. 연락하며 즐거웠고 설레서 행복했지만 그것이 전부여야 한다는 고백. 패배감 가득한 그 고백에 그는 바로 답을 주었다.     


고맙다고. 참으로 심플하고 모나지 않은 거절의 답이었다.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말해주어 고맙다는 두 번째 마디부터 가슴 안에 뱃멀미 같은 어수선한 설렘이 일단락되었다. 마침내 온점을 찍어냈다는 기분. 무엇보다 후련했다. 이제 알 건 알았으니 그가 부담을 갖고 자연스레 멀어져 주기만 기다리면 되는 차례였다.     


커피잔을 두고 마주 앉은 게 아니기에 눈빛과 목소리 같은 걸로 그 감정을 다 헤아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손안에 핸드폰을 쥐고 10초, 30초, 1분을 기다리며 저쪽에서 무슨 답을 할까 기다리는 건 퍽 조마조마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대뜸 건네버린 당황스럽고 영 앞뒤라고는 없는 고백, 글쎄 고백보다는 일방적인 털어냄에 가까운 소회라 미안하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어차피 그와 난 안 될 거니까, 라며 이렇게 멋대가리 없이 하는 건 일방적인 처사였다. 그러나 그때의 내겐 자잘한 감정 하나하나 다 느껴지는 게 짐스러웠다. 당신도 나도 이럴 게 아니니 이쯤 하자는 말이 그리도 어렵고 초라했다. 이제 책임감의 무게가 20대만 같지 않은 나였다. 가벼운 연애, 아니면 그보다 못한 캐주얼한 인간관계 (특히 남녀 사이) 같은 걸 곁에 두고 히히덕 댈 처지가 못 됐다.      


그 말인즉, 애매한 사이로 지낼 거면 없느니만 못하단 거다. 그리도 오랜 시간 질질 끌어온 두 사람의 옅고 희미한 호감 같은 걸 더 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일방적이고 자신 없는 판단의 시작은 거기부터 시작이었다.     


어쨌거나 먼저 마음을 터놓은 건 굉장히 나다운 진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죄가 아니다. 마음의 크기가 다르고 온도가 다른 걸 원망하며 내내 기다려 애태울 성정이 아니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교류는 티가 나야 한다. 꽁꽁 감추고 숨겨봤자 어느 것도 시작되는 게 없다. 들켜야 시작이 되는데 들키기보단 먼저 드러내는 게 속 시원하고 멋있다고 생각한다. 

내 감정이니 내가 이끌고 싶은 마음이랄까.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데 진짜 내 마음만큼이라도 내 의지대로. 어차피 어려울 길, 가지 않겠다는 마음씩이나 먹었으면 더 뜸 들일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섣부르고 경솔하다고 여길지언정 여태 난 그래왔다. 그래서 지난 인연에 큰 후회가 없다. 그때 좋아한다고 말할 걸, 보자고 할걸, 만나서 기쁘다고 할걸, 살다 보니 이런 류의 후회를 하지 않으려 매 순간 매 사람에게 노력했다. 속상하고 아픈 건 어차피 잠깐이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고 나는 나대로 삶에 충실하면 되리라 얼렁뚱땅 넘겨 살면 되리라, 여태껏 그랬듯 그러면 될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전보다 빠르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글쎄 나라면 부담스러울 사람이 좋아한다고까지 말하고 마음까지 털어놨으면 은근슬쩍 거리를 둘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연락에 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며칠이 지나면 말을 걸었다.      

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SNS 스토리를 보고 연락을 하는 게 가장 많았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는 그랬다. 감기도 가볍게 앓고는 지나가는데 감정 정리하며 멀어질 시간도 안 주고 말이다. 전처럼 어딜 갔네요? 여기 맛있죠. 어쩌네, 저쩌네. 나의 관심이라도 사려는 듯이,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구는 태도에 헷갈렸다.     


나 모르는 사이에 애매함을 즐기는 요즘 사람들이 늘어난 건가? 나랑 잘할 것도 아닌데 굳이 왜지? 그냥 아는 누나로 잘 지내고 싶었던 건가? 아니 그럴 거면 둘 다 군더더기 없는 마음에서나 가능한 건데 나는 이미 흑심을 품었던 사람인데 왜?     


이미 거절했으니 헷갈릴 일이야 없는데 혼란스러웠다. 그는 무슨 마음인지 속 시원히 잘 털어놓는 성격을 지닌 사람도 아니었고 나 역시 우리 사이에 이러기 어색하지 않냐며 묻기가 머쓱했다. 마음은 남아있어도 덜어내기로 했으니 이제 더 의미 부여를 하고 매달려 있을 수가 없었다.      

혼자 해 본 생각은 나만큼의 호감까지 미친 건 아닌데 같이 뚝딱 접어지지는 않는 얕은 관심이 아직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포기가 안 된다는 거까지는 당연히 아니고 그저 아쉬운 무언가가 남아서. 그렇다고 뭘 할 건 아닌데. 혼자 판단하고 혼자 고백하고 혼자 정리하고 있는 나와는 결과 속도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여지를 남기려는 게 아니라, 나보다 몇 살은 어렸고 연애는 어렵다고 그랬으니까. 그렇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렇게 몇 달을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매일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자잘한 일상을 이야기했다. 

놀랍게도 몇 달을. 그냥 그런 채로 보냈다. 지난 내 고백에 대한 감정, 전후의 변화나 진실한 속내를 쏙 빼두고 그렇게 수박 겉핥기 같은 연락이 이어졌다. 늦여름 짧은 반바지를 입고 민소매를 입고 다닐 때부터 시작한 연락을 두터운 패딩과 목도리로 꽁꽁 싸매도 추운 겨울이 오기까지 이어간 거다.


설마 이 정도로 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스며야 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멋대로 좋아했었네, 어쩌네, 혼자만의 감정을 터놓고 꼬리 자르려던 건 나였다. 짝사랑에도 이별이란 게 있는 법이다. 짝사랑을 시작하고 빠져들었다가 끝내기 위해 고백을 빌미로 마침표를 찍은 것도 나였다. 그러니 나는 이미 끝난 일로 하고 싶은 그였다. 그런데 미안하고 고맙다던 그가 나를 놓지 않고 있었다.      



답답함에 지쳐 설레고 들뜨는 감정은 저물어가는데 이렇게 타이밍이 엇나가게 다를 수가 있나. 정체 모를 친밀함이 눈처럼 쌓여갈 무렵부터 그는 진짜 ‘썸’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십 대 중후반만 됐어도 설렜을 법한 이야기를 툭툭 건네기도 했고 그중엔 ‘우리가 언젠가 잘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식의 뉘앙스를 짙게 묻힌 농담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듣고 기분은 두 가지로 갈렸다. 이제 와서 슬슬 내가 좋아지기라도 하는 건가, 요즘 애들은 순서와 절차 같은 걸 뛰어넘고 선을 넘나?로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몇 번씩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고백할 무렵의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는 게 결론이었다. 누가 아직 아무 사이 아니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에게 섹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농담을 툭툭 건네나.

내 답장에 뜸 들이는 몇 시간 사이에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있는 거였다. 혹은 이미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긴 한데 남 주기엔 아깝고 나 갖기는 싫은 여자라서 모호하게 굴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이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기 싫어서 애초부터 고백으로 분명히 해두려던 거였다. 보기 좋게 거절당해 놓고도 난 왜 이리 질질 끌려다니고 여지를 못 거둬서 미련하게 굴까. 그의 연락이 잦아질수록, 마주칠 때마다 눈을 마주치는 게 자연스러워질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대체 저 남자의 마음속에 내가 어떤 꼬락서니일까나. 

어쩐지 확신에 찬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진즉 확신에 찬 애정이나 그 엇비슷한 감정이었다면 뭐가 되고도 남아야 할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숙맥이라 해도 이리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고 확실한 액션이 없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숙맥이라니? 무슨 이야길 하다 ‘속옷.. 어쩌면 볼 수도 있는 거죠.’, ‘농담이었어요.’ 따위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익다 못해 나무가 휘어질 만큼 무겁도록 익어버린 과일같이 야릇한 긴장감 넘치는 대화가 직구로 꽂혔다. 그와 내 사이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몇 달 전 단둘이 술을 한잔 기울이던 밤, 머릿결 한번, 손목 한번 잡은 이후. 내 초라한 고백과 거절 이후. 

그렇게 두 번씩 엇나감 뒤에 외려 저쪽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성격을 띠는 데에 의뭉스러웠다. 어딘가 찜찜하고 답답한 의문이 자꾸 부풀어갔다. 묘한 기류가 생긴 남녀 사이를 두고 좋다고 헤헤거리기엔 풍파가 조금 잦은 삶을 살아왔었다. 본능적으로 나 살기 위해 예리한 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러는 이유가 산뜻한 유혹이나 호감 같은 게 아닌 기분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보인 호감과 애정 비슷한 걸 담고 있던 눈동자가 나란 사람이 아니라 내 껍데기, 내 몸으로만 향했던 거였을까?     


누가 그랬지. ‘촉’이라는 건 그저 생사람 잡는 의심이 아니라 수십 년을 살아감으로써 채워온 데이터베이스라고. 굳이 더 알기 전에 나의 그 ‘촉’을 반신반의해서는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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