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무슨 사이야?”

- 주저하는 게 아닐지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특히 나이 먹을수록) 굳이 확실하게 사귀자는 말을 해야 만나는 거냐, 지금처럼 자주 만나서 밥 먹고 데이트하면 그게 연애지.라고 애매하게 대처한다. 우리 나이가 몇인데 애들처럼 사귀네, 마네, 오늘부터 1일이네, 어쩌네 해야 하냐고.

그렇게 대처하다가 어느 날 놓치면 안 될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면 꼭 그이에겐 우리 이제부터 사귀자고 도장부터 찍고 본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몹시 자존심 상하는 거 알지만 애초부터 나는 아니었다고 인정하면 깔끔해진다.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 놓치기 싫으면 흐지부지 안 하고 냅다 관계 정립부터 하게 마련이지 않나? 남자든 여자든 말이다.      

큰일 생기기 전에 ‘회피’라는 불치병을 앓았다. 거절 못 하고 호불호 표현하는 게 두려웠다. 문제 앞에서 도망 다니고 숨었다. 그거 다 똑같이 안 당해봐서 그런 거다. 살며 겪는 것 중에 사랑 고백, 관계 확립? 어렵고 힘든 얘기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성향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회피할 데가 있고 안 할 데가 있지. 가만히 두면 딴 놈이 채가는데 그걸 그냥 두는 바보가 어딨나.

길게 보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 솔직하지 않으면 솔직한 쪽에서 먼저 떠난다.     

사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성별을 불문하고 사귀기 전에 거하게 한 번 했다 치자. 이게 선섹후사의 과정인가, 갸웃거리고 지켜보는 것도 꽤 됐는데 우리 무슨 사이냐, 이제 제대로 사귀자는 말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는 상대, 더 볼 것 없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좀 더 알아보자고 했다고? 야, 할 거 다 해놓고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그거 말장난이다. 같잖은 꾐에 솔깃하지 말고 돌아서야 한다. 이 넓은 세상에 온전하고 건강한 사랑 쏟아부을 사람 하나 없을까. 물론 그놈의 정(情)이 무섭긴 하지. 이것저것 여러 정들었겠지, 안다. 그렇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이에게 팔자 조져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연애할 생각 없이 공공의 욕구 해소처가 필요한 사람에게 감정 소모하기 싫다면 이쯤 하고 손 털자.      

내 얘기 좀 들어 봐. 하면서 울고 짜고 머리 뜯는 친구들이 내놓는 얘기가 거의 비슷한 맥락이다. 이미 진즉 다른 이의 결말을 실컷 봤지만 입을 다문다. 꼭 찍어 먹어 봐야 똥인 걸 알고 데어야 뜨거운 걸 알더라. 그건 나도 그랬다. 근데 하나 희망적인 얘기를 하자면 감정에 솔직했던 쪽이 뒤탈이 적다. 먼저 속상할 뿐인 거지 진 것도 아니고 이용당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그 인연이 그 정도였던 거다. 하필 그런 사람이 일상에 걸려든 거고 엮였던 거다. 기꺼이 삶에 스며 섞일 정도의 사람이 아닌 거다. 스치는 모든 사람과 사랑할 수는 없다. 스쳐서 가라고 보내야지, 뭐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