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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pr 08. 2024

그 공시생이 순진한 사람을...

그렇게 됐다

2024. 4. 7

< 사진 임자 = 글임자 >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거야?"

"엄마 말이 맞지. 엄마는 있었던 사실만 말한다니까."

"아빠 말은 안 그렇던데?"

"너희 아빠가 착각했나 보다."

"아빠, 진짜야? 진짜 엄마 말이 사실이야?"


모녀의 대화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던 그 양반이 발끈했다, 드디어.

"아빠 말이 맞다니까. 어휴."


올해로 벌써, 믿기 힘들지만, 결혼한 지 13년이 넘은 마당에 '누가 먼저 접근했나?'는 언제나 우리 집의 뜨거운 감자까지는 아니고 '미지근한 감자' 정도의 대화거리이다.

"합격아, 너는 절대 온라인에서 모르는 남자가 쪽지를 보낸다거나 말을 걸어오면 절대 대꾸하지 마. 알았지?"

"왜?"

"누가 누구인지 알고 대꾸를 해?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무조건 조심해야 돼. 사기꾼들도 많고 나쁜 사람들도 많아. 옛날에 말이야, 아빠가 엄마한테 쪽지를 보냈어, 먼저."

"어떻게?"

"공무원 시험 끝나고 공시생 카페에서 커트라인 예상하다가 웬 사람이 엄마한테 쪽지를 보낸 거야. 나 때문에 자기가 떨어진 것 같다고."

한 오백 년 전에 그 공시생은 일면식도 없는 내게 다짜고짜 나 때문에 지방직 시험에 떨어진 것 같다며 쪽지를 보내왔고 굳이 하지 않아도 좋을 답장을 나는 보냈고 그렇게 몇 번 쪽지가 오갔었다.

"그러면서 자꾸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거야. 엄마는 그때 농사일 바빠서 나중에 농한기 때 만나자고 그랬는데 자꾸 아빠가 만나자고 만나자고 하도 떼쓰는 바람에 '만나줬지'. 한 번 만나고 나더니 다음에 또 만나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그러자고 했지. 그랬더니 나중엔 사귀고 싶다는 거야. 하여튼 너희 아빠 눈 높은 건 알아줘야 해. 눈이 얼마나 높은지 머리 꼭대기에 달린 줄 알았다니까. 반면에 엄마는 그때 눈을 감고 살았어.(이 대목에서 항상 그 양반은 격분하곤 한다. 정작 눈이 높은 사람은 본인이라고, 정말 눈을 감고 산 사람은 본인이라고. 하지만 나는 결코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내 할 말만 한다)하긴 아빠가 보는 눈이 높으니까 엄마랑 사귀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겠지. 그래서 엄마가 물었지. 마약 하냐? 도박하냐? 둘 다 안 한다고 해서 그래서 사귀기로 했어. 엄마는 국가직 공무원은 떨어지고 지방직에 붙었고, 다행히 아빠는 지방직은 떨어졌지만 국가직 공무원은 붙었지. 하지만 진짜로 아빠가 2등이었는지는 몰라. 어차피 떨어지면 자기 점수 확인은 가능한데 지방직 합격자 발표 한 다음부턴 점수 얘기 안 하더라. 아무튼 아빠가 근무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냥 엄마 있는 지역으로 오라고 해서 아빠가 바로 이쪽으로 지원해서 근무하게 된 거야. 아빠는 이 지역에 아무 연고도 없는데 말이야. 엄마가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 그리고 1년 정도 사귀고 나서 결혼했지. 그다음부터는 잘 알지? 신혼여행 갔다 오자마자 다른 공무원 하고 싶다고 아빠가 일 그만두고 중간에 공부는 안 하고 주식에 빠져있길래 엄마가 아기라도 낳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너를 임신했지. 다시 너희 아빠 공무원 합격하게 해달라고 네 태명도 '합격이'라고 지은 거야. 덕분에 아빠도 합격했고 그렇게 된 거야. 외할머니가 모르는 사람하고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엄마가 외할머니 말을 안 들어서 이렇게(?) 됐어. 너는 절대 모르는 사람하고 말하지 마. 요즘 세상이 오죽 험해야 말이지. 엄마는 처음에 아빠가 무슨 사기꾼인 줄 알았어. 수험생을 사칭한 그런 사기꾼 말이야. 아빠랑 얘기하면 뭔가 좀 이상한 게 있긴 있었거든.(물론 이 부분에서 또 그 양반은 발끈하신다, 정작 이상하다고 느낀 건 본인이라고) 아무튼 뭐든지 조심해야 해. 특히 사람이 제일 무서운 세상이야. 귀신은 하나도 안 무서워. 사람이 정말 무서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그때 엄마가 아빠 쪽지에 답장만 안 했더라도..."

"그래도 아빠랑 결혼해서 우리가 태어났잖아. 좋은 거 아니야?"

"그건 당연히 좋지. 너희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빠를 만난 건 잘 된 일이야. 그치?"

"그래, 그렇다고 치자. 아빠를 안 만났으면 너희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결론은 다 잘 됐잖아."

"그런가? 아빠가 그런 식으로 도대체 몇 명의 여자한테 접근한 걸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갑자기 그 양반이 끼어들었다.

"아무튼 그땐 엄마가 너무 순진했어."

"순진한 건 아빠였지. 엄마가 순진한 아빠한테..."

"무슨 소리야? 쪽지를 먼저 보낸 사람이 누구지? 만나자고 만나자고 사정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사귀자고 한 사람은 누구고, 결혼하자고 제발 결혼해 달라고(물론 이건 내가 하는 소리다, 그 양반은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뗀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내게 사정하는 걸로 느껴졌다) 사정한 사람이 누구였냐고?"

모녀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그 양반은 간헐적 간섭을 하며 때늦은 해명을 하기도 했지만 우리 세 멤버 중 그 어느 누구도 새겨듣지 않는 눈치였다.(라고 나 혼자만 믿었다)


< 오늘의 교훈 >

온라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쪽지를 보내오거든 절대 답장하지 마라.

답장까지는 할 수 있지만, 만나지는 마라.

한 번쯤은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사귀지는 마라.

아니, 사귀는 것까지는 괜찮다. 결혼하지는 마라.

아니 아니,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네 자유다.

너 알아서 살아라.

엄마도 외할머니 말 안 들었는데 너라고 엄마 말 듣겠어?

어차피 자기 인생은 자기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거지.

세상 일이란 게 다 내 마음대로는 안되더라.

그냥... 참고만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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