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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09. 2024

거실에는 발자국

발자국에는  잔소리

2024. 11. 8.

< 사진 임자 = 글임자 >


"또 발도 안 씻고 들어왔네."

"내 발 깨끗해."

"깨끗하기는 뭐가 깨끗하다고 그러요. 보시오, 여기 다 묻히고."

"흙밖에 안 묻었어."

"흙 묻었으믄 밖에서 발을 씻고 와야 쓸 거 아니오?"

"흙 이런 것은 아무 문제없어."

"내가 거실 청소 다 해놨구만 또 발도 안 씻고 들어 온다."


엄마와 아들의 대화가 아니다.

자그마치 칠순도 넘은 친정 부모님의 대화다, 안타깝게도.

그러나, 나는 이런 비슷한 종류의 대화를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기억이 스쳤다.


20년도 더 오래된 기억 속에서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큰아들(나의 친정 아빠)에게 말씀하셨지, 일하고 들어왔으면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설마 밖에서 하루 종일 농사일 하시느라 사방에 흙이 묻은 채로 귀가하신 아빠가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으실 리는 없지만 할머니는 항상 저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아빠 연세가 이미 쉰도 넘었을 때인데도 말이다.

엄마 눈에는 아무리 자식이 나이를 먹어도 (연로하신 부모님께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그저 애로 보인다더니 그런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그 말씀을 안 하시면 엄마가 항상 말씀하셨다.

1차적으로 밖에서 최소한 발은 씻고 들어오시라고 말이다.

"그렇게 흙을 다 묻히고 안으로 들어오믄 쓰겄소? 한두 살 먹은 애기들도 아니고 꼭 말을 해야 씻을라요?"

그러나 아빠 기준에서는 대개가 '그다지' 지저분하다고 생각되지 않았으므로 밖에서 1차로 발 씻기 같은 건 가볍게 패스하고 바로 거실로 입성하시기 일쑤였다.

"내가 느이 아빠 때문에 못살겄다. 어째 저라고 말을 안 들을끄나? 거실 청소도 안함서 내 일만 만든다."

그러나 나는 불현듯 또 그 기억이 스쳤다.

"느이 아버님도 밖에서 안 씻고 들어오신다. 나는 발이라도 씻고 들어 오시면 좋겠는데 말을 안 들어."

언젠가 시가에 갔을 때 어머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머님, 합격이 아범은 집에 오면 손이라도 씻고 뭘 했으면 좋겠는데 제 말을 잘 안 들어요. 제가 일일이 말해야 한다니까요. 왜 그럴까요?"

최소한 외출하고 집에 돌아왔으면 손만이라도 씻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잘 안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매일 당장 목욕재계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단 30초라도 좋으니 제발 손이라도 씻어 달라고 말하는데도 내가 너무 유난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곤 했던 것이다.

"나도 밖에서 일하고 와서 바로 안 씻으면 안 좋더라. 일단 씻고 다른 것을 하면 좋을 텐데 안 그래. 네 기분 내가 안다."

라며 어머님이 그나마 나를 이해해 주셨다.(고 믿는다)

"밖에서 대충이라도 발 씻고 들어 오는 것이 그라고 힘들까? 어째 내 말만 안 듣는가 모르겄다. 봐라, 여기 아빠 발자국 난 거."

과연 엄마의 주장대로 거실 바닥에는 선명하게 어떤 모양이 찍혀 있었다. 이 정도면 엄마가 속상하실 만하다.(고 나는 진심으로 엄마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발자국은 아빠가 냈는데 그 흔적을 없애는 건 거의 엄마 몫이라는 게, 허리도 안 좋고 무릎도 안 좋은 엄마 몫이라서, 그게 문제인 거다. 몸이 안 좋아서 요즘은 청소하는 것도 큰일이 되어버린 엄마 입장에서는 전혀 과민반응을 보인 것도 아니라고 판단됐다.

"아빠, 어차피 발 씻어야 되는데 밖에서 한 번 대충이라도 씻고 오시지. 엄마 성가시게 하지 말고."

나는 또 엄마 편에 설 의무감에 주제넘게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들은 왜 그러는 걸까?

50년 가까이 같이 살았는데 왜 아직도(?) 그러시는 건지 나는 아빠가 도무지 이해 안 됨과 동시에 일종의 불안감마저 느꼈다.

나는 이제 겨우 13년째, 그렇다면 앞으로 몇십 년을 똑같은 말을 그 양반에게 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 설마?

제발, 친정 부모님의 현재 모습이 미래의 나의 모습이 아니 되기를.


(양가) 아빠들은 도대체 왜 그러실까?

남편은 도대체 왜 그럴까?

친정 엄마와 나, 그리고 시어머니, 이렇게 우리 셋은 어느 면에서는 닮았다.

그리고 친정 아빠와 그 양반, 그리고 시아버지도 어느 면에서는 또 기가 막히게 닮았다.

이런 게 천생연분인 걸까,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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