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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21. 2022

부부 공동 작문 구역, 자기소개서 쓰던 밤

어떤 천생연분

22. 11. 20. 우린 제법 잘 어울리는 걸까요?

< 사진 임자 = 글임자 >


"자기야 뭐해? 빨리 와 봐. 급해!"

"무슨 일인데 그래?

"빨리빨리!"

"왜 또 그렇게 호들갑이야?"

"얼른 와 보라니까 당장!"

"나 설거지하려고 그러는데 왜 자꾸 부르냐고?"

"설거지고 뭐고. 얼른!"

하도 숨넘어가는 소리를 해대서 무슨 일 난 줄 알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숨은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모니터의 한글 문서 화면이 아래로 자꾸 넘어가고 있었다.

하여튼, 뭔가 (본인에게만) 급한 일이 닥치면 요란스럽게 구는 거 알아줘야 해.


"나 자기소개서 쓴 건데 한 번 봐줘."

남편이 하는 자기소개서 같은 것은 안 보고 싶다.

내가 그에 대해 거 알아야 할 것이 있었던가?

아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까지 겪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다,라고 나는 혼자 가만히 생각한다.

"일하면서 대충 쓴 거라 두서없어. 급히 써서 문맥도 안 맞고. 한 번 봐 봐."

과연 가관이었다.


"이 말했다가 저 말했다가 너무 엉망 아니야?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해? 앞 뒤 문맥이 연결이 전혀 안 되잖아? 지금 여기서 이 말은 할 소리가 아닌데? 무슨 재롱 잔치해? 왜 이렇게 썼어?"

"그러니까 자기한테 부탁하는 거지. 난 너무 피곤해서 좀 쉴게. 잘 읽어 보고 손 좀 봐줘."

자기소개서보다는 나는 그 '사람'을 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히는 순간들이 꽤 있었다, 고 느닷없이 양심 고백한다.

남편도 똑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 '소개서', 그런 것 말고 '폭로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그를 뒷바라지할 의향이 있었다.

남편이 내게 구원 요청을 해 온 것은, 물론 내가 남의 자기소개서를 손 봐 줄만큼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래도 나보다는 낫잖아.'라는 그릇된 신념으로 지금껏 무슨 건수만 생기면 내게 하청을 주었다.


원청업자는 피로를 이유로 '자기소개서'에서 손을 뗐고, 하청업자는 설거지 따위 팽개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런 능력이 입증되지도 않았지만) 간간이 지적질을 해가며 뭐라도 된 양 아무말대잔치를 해댔다.

"뭔가 좀 부족해. 꼭 도에 가서 일해보고 싶다는 그런 말이 너무 비굴하지 않게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당당하되 비굴하지 않기, 그런 내용의 강의를 들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그 자기소개서가 내 것인지 남편 것인지 헷갈린다.

그날 밤 나는 원청업자의 횡포를 경험했다.

일단 하청을 주고 나면 정작 당사자는 나 몰라라 하기.

하청만 주면 다야?

원청업자로서 책임감 내지는 의무감이란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이거 자기소개서잖아. 이왕 하는 거 잘 좀 써서 내 봐. 남의 일 보듯 하지 말고."

"수능 날 새벽부터 출근하고 너무 힘들어서 그래. 다른 사람들도 다들 힘들다고 하더라."

"나도 전에 선거 있을 땐 사전 선거일 하고 선거일 당일 때 새벽 4시에 나간 사람이야. 물론 피곤하긴 하겠지만 이거 내일까지 제출해야 한다며? 이왕 하는 거 잘 좀 해 보자."

백 년 묵은 옛날 직장생활 얘기까지 들먹이며 자극했지만 그의 의지는 처음과 달리 점점 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에이~ 몰라. 안되면 말지 뭐."

안되면 말 거 애초에 뭐하러 일을 벌였을꼬?

할 거면 하고 안 할 거면 말지.

"전입시험 보기로 결정했잖아. 그럼 하는 것처럼 해 보자.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봐야지 이왕이면. 안 갈 거면 몰라도."

"나도 알아. 근데 너무 피곤해."

그는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나는 왜 남(편)의 일에 이토록 애면글면 애태우고 있는가.


"이렇게 다 삭제해 버리면 어떡해? 너무 양이 줄어버리잖아."

"굳이 필요 없는 말 같아서 그랬어. 너무 말만 길게 늘어 빼고 문장이 길어지니까."

"그렇긴 하네."

남편의 최대의 장점, 수긍이 굉장히 빠르다.

IT강국의 자랑스러운 국민답다.

"근데 이 말은 넣어줘야 할 것 같은데? 왜 뺐어?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이 뭔지 이해를 못 했구만?"

"자기 생각으로 쓴 걸 내가 어떻게 그 속을 다 알아? 그럼 직접 고쳐 봐."

기껏 해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 거, 애초에 남의 자기소개서에 발을 들이는 게 아니었다.

자기소개서를 두고 괜히 부부싸움이 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째 요새 한동안 평화롭다 싶더라니.


"아휴, 그냥 적당히 해. 무슨 글짓기 대회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러자. 나도 너무 피곤해서 집중이 안된다."

"어차피 사무관님이 싹 다 갈아엎어 주실 거야."

"맞아. 그러실 거야."

중에 공문 올릴 때 점검 다 받고 지적당할 거 호되게 당하고 할 터였다.

그리하여 밤 11시가 다 되어가도록 쉽사리 합의를 보지 못했던 자기소개서는 '사무관님의 (구원의) 손길 찬스'를 쓰기로 하고(물론 그분의 의사 같은 건 부부의 안중에 전혀 없었다.) 급히 마무리되었다.


"근데 혹시 면접 때 외모도 볼까? 그럼 어떡하지? 자긴 예선 탈락이잖아. 큰일이네. 나랑 같이 갈래? 같이 가 줄까? 그럼 최소한 과락은 안 할 거야. 근데 입고 갈 드레스가 없네. 이참에 한 벌 사 줄래?"

"무슨 소리야. 나 정도면 수석으로 합격하고도 남지."


아깝다.

작전 실패다.

실없고, 세상 쓸데없으며, 하나마나한 소리만 하는 영양가 없는 아내의 말에, 기고만장하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도 못한 데다가 자아도취에 빠진 남편의 대답이다.

나는 이를 일컬어 (몹쓸)'천생연분'이라 정의한다.

아내의 내조 없이 혼자의 힘으로 성취해내고 말리라는 저 굳센 의지의 남편을 보라!


이것이 바로 온라인 소통 공간의 축복이다.

최대 수혜자는 우리 부부다.

다행이다.

실물을 공개할 의무가 없는 온라인 공간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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