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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27. 2022

남자 친구가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면사무소에 부는 중매 바람


22. 11. 23. 이 겨울에 된서리나 맞으려고 꽃이 핀 것은 아닐 텐데

< 사진 임자 = 글임자 >


"너 저기 OO 한번 만나 봐라."

"네? 누구요?"

"저기 저 OO 말이야."

"제가 왜요?"

"너 결혼 안 했다며?"

"네."

"그러니까 한 번 만나 봐. 애가 착실하고 진짜 괜찮아."

"저 남자 친구 있는데요?"

"있으면 어때?"

"엥?"

"만나 보기나 해. 진짜 사람이 괜찮아."


나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분명히 밝혔고, 면사무소 안에서는 이미 다 아는 사실이었으며, 그의 정체를 파헤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은 데다가 정말 순식간에 꽤 많은 정보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한 분이 자꾸 내게 권유를 가장한 유혹 내지는 강력한 제안을 하셨다.

"만나 봐 한 번, 조건이 좋아."

조건이고 뭐고 난데없이 이게 무슨 경우람?

"남자 친구 있다니까요."

"그래도 만나 봐."

자꾸 '만나라 만나라' 밀고 나가는 그분이나, '싫어요 싫어.'라고 단번에 거절하지도 않았던 나나 대책 없는 사람들이다.


 "엄연히 현재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무슨 그런 망측한 말씀을 하세요? 그건 그 친구를 기만하는 행위이며 사람 된 도리로 결코 할 짓도 못되고 해서도 안됩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는 못했다 물론.

'혹시 남자 친구가 나를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 급파한 스파이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기는 만나보라고 했지, 사귀라고 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잖아.

문제는 같은 사무실 직원이라는 점이다.

내 입장 같은 것은 생각도 않고 무조건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그분은 막무가내였다.

봐도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업무 책자들을 보며 내가 일을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심란해하고 있으면 어느새 조용히 내 옆자리로 다가와 민원용 의자에 자리 잡고 조용히 자꾸 속삭이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사자 직원의 마음인데,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람에게 굳이 만나자고 할 리도 없을뿐더러, (당사자는 꿈에도 모르고) 관심 있지도 않을 것을 그분 혼자만 열을 올리셨다.

면사무소는 이렇게나 정이 넘치는 곳, 사교의 장이다.

남자 친구가 있지만 또 다른 남성을 소개해 주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분이 다 계신다.


이미 발령받은 첫날, 낯선 할머니로부터 초반에 다소 저돌적인 대시를 받았으나(그때도 할머니 혼자만의 일방적인 대시였다.), 나이가 '서른 살이나 먹었다.'라는 이유로 가볍게 차인 나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중매다.

누구 하나 그분께 그런 부탁을 하지도 않았으련만 어찌 저리 안달복달하시는고?

얼마나 그 직원을 좋게 봤으면 저러시나.

놓치고 싶지 않은 자리가 아니라, 놓쳐야만 하는 자리다.

여동생이라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복잡한 머릿속에서 내 친구 중에 아직 미혼인 친구 리스트를 잽싸게 작성했다.


"너는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서 해주는데도 마다 한다."

"남자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요?"

"괜찮다니까. 그런 거 신경 쓸 거 없어. 너만 말 안 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

딴에는 그렇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신경 쓸 거 있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설득당할 듯 안 당할 듯 아슬아슬했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단념이라고는 모르는 그분은 며칠 후 다른 직원으로 재시도하셨다.

어이도 없고 황당하고 기가 막히다고 할밖에.

"남자 친구 있어요."

"남자 친구 없어요."

라고 잘못 들으신 걸까?

그럴리는 절대 없는데 이상도 하다.

아니지, 그건 둘째 치고, 나랑 얼굴 본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일주일도 안됐을 때였는데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렇게 과감히 중매자 역할을 하시는 걸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은 많고, 다 이해하고 살아야 할 의무 또한 없다.


그분의 성의는 고맙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는 내 입장, 아니 거절해야만 하는 내 입장은 또 어떻고?

지은 죄도 없이 괜히 그분 얼굴 볼 때마다 껄끄러워졌다.

단지 일방적인 그분의 마음일 뿐인데 내가 왜 불편해져야 하는 거지?

호의라고 다 같은 호의가 아님을 그분은 모르셨던 걸까.

아무리 좋은 뜻으로 베푼 호의라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게 과연 호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행히 뒤끝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날 대하기는 하셨지만 말이다.

직원들 시집, 장가보내기가 그분에게는 사명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무턱대고 당하는 사람은 또 무슨 죄인가.

이미 남자 친구도 있는 마당에 새로운 사람을 소개해 주려고 하지 말고 면사무소 일이나 가르쳐 줬으면 정말 좋겠다, 왜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뒷전이고 엉뚱한 사생활만 가지고 그러는지 신규자는 몰라서 당하고, 참느라 또 당한다.


그랬던 내가,

신규자들이 들어오면 궁금해 못 견딘다.

"사귀는 사람은 있어?"

"결혼은 했어?"

하고 대놓고 묻지는 않는다, 물론.

나보다 더 발 빠른 선구자들이 진작에 신상 파악을 해서 듣고 싶지  않아도, 어쩔 때는 마침 듣고 싶었던 차에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주는 것이다.


그러나 종종 자세한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 들은 말도 아닌데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된 내용을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걸 볼 때면 사람이야말로 정말 가장 진화된 잔인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며 치가 떨릴 때가 있다.

나도 그 옛날 저런 식으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내리고 했을 거란 생각에.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전혀 상관도 없는 남이 중간에 나서서 엉뚱한 일을 하고 뜬금없는 소리를 해서 어리둥절해질 때가 있다.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결과가 초래됐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살다 보면 각자 자기 일에만 신경 쓰고 남의 일에는 못 나서게 하는 그런 법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상대가 도움을 요청할 때만 성심성의껏 응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미리 선불로 베풀어주는 호의가 때론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도 만든다.

남들 눈에는 부족해 보이고 간섭해 줘야 할 것처럼 느끼는 일들도 결국엔 당사자가 아닌 다른 이의 주관적인 입장에서일뿐이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 많은 세상에, 한낱 소문만으로, 그들의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넘겨짚고 착각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일부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가능하면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나도 모르게, 순간의 기분에, 혼자만의 착각으로 오해를 하고 섣불리 잘못된 판단을 여전히 하고 산다.

아직도 멀었나 보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일, 정말 쉬운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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