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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19. 2022

공무원이 되려면 공부만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공시생의 연애, 그 편견에 대하여

22. 11. 10. 단풍의 절정에 버금갔던 궁금증의 절정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남자 친구는 있어?"

2009년 공무원 발령받고 첫 출근한 내가 사무실 직원들에게 그리고 간간이 들렀던 민원인들(특히 혼기를 놓친 아들을 둔 할머니들)에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면사무소 일을 하는데 남자 친구의 존재 여부가 그다지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단 말인가?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면사무소에 '대민봉사'를 위해 출근한 것이지 '사랑의 스튜디오'에 촬영을 하러 간 게 아니다.


'신규자의 남자 친구' 파헤치기가 그들의 근평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라도 하는 것일까?

훗날 그도 발령받고 같은 식으로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은 좁디좁은 곳이었으니까.

'구꿈사' 카페에서 만나 사귀는 사이가 된 '때문에 씨'가 나는 남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사귀는데 그 사람 성별이 남자였으니까.

그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의심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임자 씨, 차나 한 잔 할까?"

한 분이 나를 불러내셨다.

얼마나 자주 들락거리며 이장님들이 건넨 음료수를 마셨는지 낯선 내 자리보다 자판기 앞이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잠깐 좀 쉬어. 한 잔 하고."

그분이 차디찬 캔 음료를 건네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한 일 하나 없었는데, 몸은 너무 피곤했고 정신적으로는 지쳤다.

봐도 무슨 소리인지 통 모르겠는 업무 지침서, 편람, 사례집 같은 것은 저기 문서고 깊숙이 넣어두고 그냥 면사무소 앞에 서서 방문하는 민원인들에게 반갑게 인사나 하는 일이나 시켰으면 하고 철없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남자 친구는 있어?"

밑도 끝도 없다.

다른 직원들이 너도 나도 궁금해하며 질문공세를 펼치는 동안 도대체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네..."

그리고 그 대답 뒤에 구구절절 부연설명을 덧붙이려는 찰나, 한 말씀하셨다.

"아이고, 공부하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언제 또 남자 친구는 사귀고 그랬어?"


"공부할 때 사귄 게 아니라, 지방직 시험 다 끝나고 여기 커트라인 알아보다가 공시생 카페에서 우연히 외간 남자가 나 때문에 시험에 떨어졌다며 접근해 왔고, 쪽지를 보내와서 답장 몇 번 주고받았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그 남자가 '한 번 만나보고 싶다'라고 해서 만났고 '한번 더  만나고 싶다'라고 해서 다시 만났고, 곧 '사귀고 싶다'라고 해서 '마약과 도박은 혹시 하지 않느냐'라고 물었는데 그런 것은 전혀 하지 않는대서 그래서 사귀게 된 거예요. 처음엔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해서 사귈 마음 같은 거 맹세코 추호도 없었어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몰랐었고요. 그 사람과 결혼을 약속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사실 공무원  합격만 하면 선자리 알아봐 주겠다는 분도 계셨다고요. 공부하면서 남자 친구랑 놀면서 시험 본 거 절대 아니에요."

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물론.


변명의 말 혹은 오해의 소지는 애초에 없애려 했던 내 마음과는 달리 그분은 느닷없이 나이를 들먹이기 시작하셨다.

"올해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서른이예요."

그러니까 그분의 표정이 뭐랄까,

'공부는 게을리하고 남자 친구나 만나고 다니다가 이렇게 합격이 늦어졌구만?'

하는 그런 류의 것이었다, 고 나는 생각했다.

나만의 오해일 수도 있다.


도둑은 또 한 번 몹시도 제 발이 저리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전에, 기원전 2,000년 전쯤에는 그런 생활을 했었으니까.

그분이 나의 공시생 시절 초반의 과거를 다 뒷조사하기라도 하셨나?

그러나 2009년 당시의 남자 친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과거 청산하고 새 출발 한 지 이미 오래다.


졸지에 나는 날라리 공시생 출신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다.

철없던 대학 시절 두 눈덩이에 은은하게 펄이 들어간 '스카이 블루 아이 섀도'를 하고 소개팅 자리에 나갔을 때 상대방이 나를 보고 날라리인 줄 알았다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할 때만큼이나 분하고 억울했다.

화장품 가게의 '블루 스카이 아이섀도'가 나를 반겨주었고, 마침 내 마음에 쏙 들길래 샀을 뿐이고, 샀으니까 사용해야 마땅했으므로 나는 한동안 정성껏 눈두덩이를 반짝반짝 빛나게 화장을 했을 뿐이다.

베이지나 피치로 바꿔 발랐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으려나?

아무 죄 없는 화장품 회사를 걸고넘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끔은 살다 보면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엉뚱한 오해를 사는 일이 있다.


그날 하루 생각했다.

가엾은 사람,

남자 친구 귀가 얼마나 가려웠을까.

얼마나 신경 쓰였을까.


또 생각했다.

공시생이라고 해서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일로 비난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공시생도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물론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하는 게 맞다, 고 나는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그래야 합격할 수 있다고.

실제로 (내 경우에)그랬다고.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곁에 있는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 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살아갈 힘이 생기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기 마련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고, 혼자이기 때문에 외로움에 사무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뭇사람들의 섣부른 편견으로 상처받는 영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몇 달 만에 바로 이듬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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