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이 아니라서 못 나눠먹었어.

고체와 분말 사이

by 글임자
2023. 6. 4.

<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빠, 엄마가 모델했대."

딸이 호들갑을 떨었다.

"뭐라고?"

남편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새된 목소리로 반응했다.

"진짜야. 엄마 사진도 찍었대."

딸이 쐐기를 박았다.

"진짜야? 언제? 어디서? 뭘로?"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남편이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러니까, '모델'이라고까지 하기엔 좀 과장된 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리고 나는 '모델'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입에 올린 적도 없는데 딸은 갑자기 엄마를 모델로 둔갑시켜 버렸다.

그러나 나는, 딸의 호들갑에 그건 절대 아니라고 굳이 정정하지도 않았다.

"엄마, 엄마가 무슨 모델을 했어?"

딸이 급히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응, 저번에 마트에서."

이제 진실을 밝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마트에서도 모델을 뽑아?"

뭔가 석연치 않다는 눈빛으로 딸은 계속 나를 추궁했다.

"그런가 봐."

생각지도 못한 나의 모델 데뷔에 이왕 모델 소리 들은 거 '왕년에(그러나 내 생애 단 한 번) 희귀한 경험을 한 사건에 대해 들려주었다.


"엄마가 마트에 가서 건강식품 코너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엄마한테 잠깐 시간 좀 내달라고 하더라고."

"그럼 그 사람이 엄마를 모델시켜 준 거야?"

자꾸 모델 모델 그러니까 양심상 찔린다. 그러나 당분간 딸의 환상을 지켜주기로 한다.

"음, 어떤 상품을 나보고 들고 보고 있는 척하고 있으라고 하더라고."

"그런 일 하는 모델도 있어?"

"엄마도 잘 모르지. 아무튼 좀 협조해 달라고 해서 말이야."

"그럼 엄마가 그 상품에 얼굴이 나오는 거야?"

설마, 그럴 리가.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이다 얘야.

모델은 아무나 한다니?

그것도 마트 안에서 느닷없이?


"그 회사에서 나온 직원인가 봐. 누군가 그 상품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진이 필요했나 봐."

"그래? 그럼 돈도 받았어?"

"아니."

"그럼 공짜로 해 준 거야?"

"그 회사 상품을 줬는데 시식용 같은 그런 거 달랑 두 개 주더라. 아마 유산균이었던 것 같은데."

"그거 어딨어?"

"엄마가 진작 다 먹었지. 달랑 두 개였는데."

"그걸 엄마 혼자 다 먹어 버렸단 말이야?"

딸은 엄마를 의리도 없는 사람 보듯 했다.

"그거 얼마나 된다고?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치워 버렸지."

"엄마, 그런다고 혼자 그걸 다 먹었어? 우리도 안 주고?"

"진짜 얼마 안돼. 너희가 전에 먹었던 유산균 같은 거야, 엄청 작잖아."

"그래도 그걸 혼자 다 먹다니."

딸은 두 봉지 다 합쳐봐야(분명히 밝히지만 두 상자가 아니라 달랑 두 봉지다.) 몇 g 되지도 않은 걸 저희들과 나눠먹지 않았다고 나를 타박했다.


"진짜 엄마 너무했다. 우리랑 같이 나눠먹었어야지."

여태 아무 관심을 안 보이던 아드님께서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 나서 주셨다.

"엄마, 엄마는 그런 말도 못 들어봤어?"

"또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실까 우리 아들이?"

"콩 한쪽도 나눠 먹으라고 했잖아. 엄만 어른이 그런 것도 몰라? 아무리 혼자 먹고 싶어도 우리를 생각해서 나눠먹었어야지!"

어디서 들은 말은 있구나.

"우리 아들이 그런 말도 알아?"

"그럼, 당연하지. 암튼 엄마 너무 했어!"

이건, 너무 집착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미안하다. 그건 가루였거든. 콩이 아니라 못 나눠 먹었어. 콩이었으면 나눠 먹었을 텐데. 콩도 나누려면 힘들 텐데 가루는 더 힘들잖아. 그래서 엄마 혼자 다 먹은 거야. 오해는 하지 마. 다음에 콩 생기면 연락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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