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대신 쓰는 아빠 일기
어쩜 그렇게 잘 알까?
2023. 6. 3. 네가 고생이 많다.<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빠는 이제 숙제해야겠다. 숙제가 많아."
직장인이 말했다.
"아빠도 숙제가 있어?"
딸이 물었다.
"그럼. 아빠 숙제 진짜 많다. 얼른 정리해서 보내야 돼."
직장인이 대꾸했다.
"아빠 숙제도 일기야? 아빠도 일기 써? 일기 쓰기 싫은데, 아빠도 쓰기 싫겠다. 아빠는 뭐라고 일기를 쓰지?"
우리 집 가장 어린 멤버가 느닷없고도 생각지도 못한 말을 불쑥했다.
나머지 세 멤버는 약간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딱 열 살 수준에 맞는 '일기 = 숙제'라는 발상에 순간 멈칫했다.
"아빠는 이런 일기를 쓰겠지? '나는 술을 먹기 싫은데 오늘도 술을 억지로 마셨다. 다음엔 조금만 마셔야겠다. 그리고 먹기 싫으니까 앞으로는 안 먹겠다고 말해야겠다.' 이렇게 쓸 거야?"
가장 어린 멤버가 술술 아빠의 속마음을 읊어 나갔다.
"아빠도 진짜 그렇게 말하고 싶다, 아들아"
직장인은 아들이 대신 쓰는 일기로나마 대리만족을 느끼는 듯도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또 생각했다.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그에 대해 느낀 점과 앞으로의 다짐, 혹은 의지를 동반한 어떤 결심까지 포함해 단 몇 문장만으로도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글쓴이의 마음을 적나라하고도 용건만 간단히, 아주 훌륭하게 쓴 일기라고 속으로 실컷 칭찬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아빠의 심정을 그렇게도 정확히 헤아리고 있었다는 점이 대견했다.
아울러 우리 집 직장인의 고충이 자녀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는 현실에 조금은 씁쓸하기까지 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 지난 적이 없는(어디까지나 직장인의 의사와는 전혀 별개로 억지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그 회식자리라는 곳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휩쓸려 술잔을 기울이는 고단함이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올봄을 정신없이 살았다는 사실에 안쓰러움과 고마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출장을 가면 항상 그 직장인은
"아빠 술 마시러 간다."
라든지
"아빠 이제 회식 끝나고 자러 간다."
라며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곤 한다.
철없는 어린것들은
"아빠 또 술 마셔?"
라고 얼핏 듣기에 별생각 없이 말하는 것 같지만 직장인을 제외하고 집에 남아 있는 나머지 세 멤버는 잘 알고 있다.
우리 집 직장인이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마실 수밖에 없는 현실에' 곤혹스러워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죽하면 아들이 아빠의 일기에 저런 글감을 다 생각했을까?
아이들이 어리고 철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어쩔 땐 어른보다도 더 속이 깊은 생각을 하고 집안 돌아가는 사정에도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어린이를 어린아이들로만 보지 말아야지.
아이들 앞에서는 말도 행동도 항상 더 조심해야지.
아이들을 가르치려고만 들지 말고 나도 그 아이들에게서 배울 건 배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