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방학에 맞춰 여정 기간은 2달로 잡았다. 그러고 보니 숙소가 문제였다. 완전 여행만을 위한 일정도 아니었고 아이의 언어연수(라기 보단 미국체험이라는 게 더 맞겠다)가 큰 목적이었다 보니 2달씩이나 되는 기간을 호텔이나 민박에서 머물 순 없었다. 마침 뉴욕에 사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해보니 '헤이코리안(Hey!Korean, heykorean.com)' 이라는 웹사이트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곳은 원하는 숙소나 정보들을 나누거나 얻을 수 있는 한국의 벼룩시장 같은 곳이었다. 뉴욕으로 떠나기 한 달 전부터 난 바쁘게 그 사이트를 뒤지고 또 뒤졌다.
미국에서 단기 렌트 한 달 이하는 불법으로 간주한다. 다만 집주인이 함께 머물며 룸메이트 형식으로 지낼 땐 상관없다고 한다. 사실 내가 보기엔 딱히 지켜지고 있는 법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튼 난 한 달하고도 보름을 지낼 숙소가 필요했다. 왜? 나머지 보름은 반평생 소원했던 플로리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언제 또 내가 미국엘 와 보겠는가 말이다.
내가 뉴욕에 갈 땐 마침 성수기여서 환율, 항공권과 여행 경비 모두가 최고치를 이루고 있는 때였다. 특히 뉴욕의 숙소 렌트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헤이코리안을 뒤지면서 일단 가격이 괜찮다 싶으면 부동산 중개업자가 끼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들은 중계비용으로 한 달 렌트비와 동일한 금액을 받는다. 가끔 중계비가 없는 집이 눈에 띄긴 했지만 지역이나 조건이 맞지 않으면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동양인들이 많이 사는 퀸즈(Queens)라는 동네는 렌트비도 다양하고 편의성은 좋아 보였지만 맨해튼에서 너무 멀었다. 길도, 영어도 생소한 아이를 생각하면 학원과 최대한 접근성이 좋은 곳을 찾아봐야 했다. 그리고 할렘(Harlem)지역은 렌트비가 싸지만 위험해서 가면 안된다는 사람들의 조언을 받았다. 그래서 피하고 또 피했다. 하지만 결론은? 우습게도 난 결국 할렘외곽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나중에 설명해 보기로 한다.
내가 선택한 단기 렌트의 종류는 서블렛(Sublease). 서블렛이란 집을 계약한 집주인이 단기 혹은 장기로 집을 비우는 동안 빌려주는 것을 말한다. 임대인이 임대인에게 집을 임대하는 것이랄까...... 물론 진짜 집주인이 이를 반대하는 것을 모르고 들어갔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겠다. 사기를 당할 수도 있고 말이다. 특히 한국에서 미리 계약금을 보내놓고 가야 하는 상황인지라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겠다. 슬프지만 운에 맡길 수밖에...... 두 모녀가 룸메이트로 들어가는 것도 무리였고, 단기간만 렌트를 할 수 있는 집은 있지도 않았지만 있어도 너무 비싸서 어쩔 수가 없었다.
난 최대한 조건에 맞는 숙소를 찾아 이메일로 접촉을 시도했다. 그다음부터는 톡으로 서로의 요구조건이나 궁금증 등을 이야기했고, 마지막으로 계약금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사실 상대방에게도 나에 대한 신뢰는 중요했을 것이다. 계약금을 받는다고 해도 혹시나 내가 계약을 엎는 경우, 짧은 시간 내 사람을 또 구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방을 엉망으로 써도 문제가 될 것이다.
다행히 계약금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지금은 뉴욕의 이민자로 살고 있는 선배가 나의 오빠로 변신하면서 처리해 주었다. 사실 이번 건은 구두계약이나 다름없었다. 보통은 신분증도 확인하고 계약서도 쓴다던데 그 집주인은 달랐다. 그저 쿨했다. 아무튼 계약이 잘 진행돼서 다행이었고 난 선배에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선배는 집주인을 만난 적도 없었고 그저 통화로만 이야기하고 계약금을 송금했었다고...... 헐.
ㅣ짐싸기ㅣ
여행의 가장 설레는 부분은 짐을 싸면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불안함에 멍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 목록을 정리하면서 느껴지는 설렘은 이보다 훨씬 더 컸다. 이미 마음은 바다 저 편에 가 있었고, 이를 상상하고, 쇼핑하고, 계획하면서 경비에 대한 걱정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내가 제일 먼저 구입한 것은 캐리어였다. 88L짜리 자체적으로 무게를 잴 수 있는 전자저울이 달린 근사하고 튼튼한 놈이었다. 사실 캐리어는 튼튼한 게 제일이란 걸 알았지만 멋진 자태 또한 포기할 수 없었다.
국제선의 수하물 기준은 각 항공사마다 다르겠지만 위탁수하물 기준으로 보통 23Kg의 캐리어 2개를 허용한다. 난 짐이 간편한 걸 선호해서 위탁 수하물 1개와 기내 수하물 1개 만을 준비했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올 땐 땅을 치고 후회를 했지만 말이다. 짐이 그렇게 많이 늘어나게 될 줄이야......
캐리어를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크기에 비해 짐은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한정적인 무게를 맞추다 보면 쌀 수 있는 짐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난 이 멋진 캐리어를 방 한편에 두고,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의 사랑스러운 여행 품목들을 보면서 하루하루 뿌듯한 나날들을 보냈다. 여행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여행을 떠나기 바로 직전이 아닐까 싶다. 비행 내내 가장 잘 사용했던 것은 필로우 후드 집업이었다. 따스함은 기본이고, 재킷에 숨겨져 있는 파이프를 입으로 불면 금방 목부분이 부풀어 오르면서 목베개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처음 이 기발한 아이템을 샀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하지만 막상 비행기 안에서 발휘된 이 후드 집업의 활약상이란......! 아무튼 다른 건 몰라도 긴 비행에서 목베개 정도는 꼭 챙기도록 하자. 평소 목베개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던 필자의 강추 아이템이다.
또 하나, 인터넷을 뒤져보니 뉴욕과 플로리다의 날씨는 매우 뜨겁지만 일교차도 크고 폭우도 잦아서 비상시를 대비해 재킷을 항상 갖고 다니는 게 좋다고 했다. 물론 난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얇은 바람막이 하나 정도면 되겠지 하고...... 결국 난 또 한 번의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짐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나올 것이다.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게 된 나의 짐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