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행 비행기는 이른 아침 출발이었다. 지각이 걱정됐던 우리는 전날밤에 공항 근처에서 숙박을 했다. 덕분에 아침엔 여유롭게 공항에 도착해서 모든 수속을 빠르게 마칠 수가 있었다.
검색대를 통과하니 바로 앞에 화려한 면세점들이 펼쳐져 있었다. 미국에서 오는 길엔 면세점이 작고 살 것이 없다 해서 필요한 몇 가지의 품목들은 미리 구입하기로 했다. 간단하게 화장품과 홍삼정도만 구입하고 비행기로 향했다.
직항인데도 불구하고 14시간 정도의 비행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이라고 좁은 곳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다리와 발이 부어오르고 온몸이 다 쑤셔온다. 중간중간 스트레칭을 해줘도 몰려드는 피로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난 언제쯤 일등석을 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히 드는 시간이다.
드디어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잠시 화장실에 들린 탓에 앞의 행렬을 놓쳐버렸다. 서둘러야 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미 줄을 서 있었고, 내 뒤로도 빠르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한두 시간이 훌쩍 넘도록 기다린 것 같았다. 이미 내 전화기는 마중 나온 선배의 톡으로 가득 차 있었다. X마려운데 왜 아직도 안 나오고 있냐고.
생각보다 입국 수속은 간단하고 빨랐다. 준비해 온 이스타 서류는 보지도 않았고, 질문도 단순했다. 총이나 반입 안 되는 무언가를 가지고 왔느냐는 정도였다. 대충 no를 몇 번 반복하고는 통과했다. 보통은 얼마나 머물 것인지, 방문 목적은 무엇인지 등을 묻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은 탓이었는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난 뉴욕에 도착했다. 참고로 뉴욕엔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말고도 다른 공항이 몇 개 더 있다. 내가 이 공항을 선택한 건 그냥 이 공항이 제일 유명했고 그것밖에 알지 못해서 그랬다.
ㅣ첫날ㅣ
맨해튼의 계약 한 숙소 날짜가 다음날부터였기 때문에 선배는 우릴 위해 호텔을 1박 예약해 주었다. 프레시 메도우란 지역의 코트야드 메리어트 호텔이었다. 전경은 볼 것 없었지만 준수한 방 사이즈와 더블 침대 두 개가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린 아무리 가족이라도 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편하기도 하지만 매우 개인적인 성향의 사람들이라......
호텔에 짐을 풀고 점심식사를 위해 선배의 차를 탔다. 아직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많이 낯설어 보이진 않았다. 선배가 퀵 가이드를 해주기 시작했다. 뉴욕역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해 주었지만 피곤해서 그런지 그런 지루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성심껏 반응해 주고는 바로 잊어버렸다. 그저 얼마 전 티브이에서 본 벌거벗은 세계사 미국 편이 떠 오를 뿐이었다.
점심식사로 선배가 선택한 곳은 바로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 나름 뉴욕에 오자마자 한국에서 먹던 것과 너무 이질감이 나지 않는 메뉴로 배려해 준 것 같았다. 식사 후, 우리는 디저트까지 즐기고 한인마트로 향했다.
뉴욕엔 크고 작은 한인마트들이 꽤 많다. 이름도 H마트, 즉 한아름 마트의 약자이다. 우리들이 도착한 H마트는 규모가 꽤 크고 물건도 상당히 많았다. 한국 물건들은 물론 한국 음식과 반찬들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로 가득했다. 우린 당장 필요한 목욕용품 외에 생수, 햇반, 김, 사발면과 간식거리 등을 카트에 담았다. 선배가 무슨 MT 가는 것처럼 장을 보냐며 놀렸다. 사실 요리를 위한 재료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나에겐 또 하나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난 여기 있는 동안 요리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늦은 저녁이 되자, 선배는 우리에게 Auburndale Plaza의 Pho Che라는 베트남 식당에 가서 저녁을 사 주었다. 쌀국수와 볶음밥이 진심으로 맛있었다. 해외 여행객들이 왜 굳이 고추장이나 한국음식들을 싸 갖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앞으로 미국에서의 식사가 내게 얼마나 힘든 시간을 안겨줄지 예견하는 것과도 같았다.
맨해튼 도심의 노을 녘
맨해튼 도심의 야경
ㅣ첫인상ㅣ
저녁 식사 후 이미 날은 저물고 어두워졌다. 쉬고 싶다는 딸을 먼저 호텔에 데려다주고 선배와 나는 숙소 주인을 만나러 맨해튼으로 향했다. 숙소 주인이 다음날 마이애미로 떠나기 때문에 렌트비를 주고 집 키를 받아놔야만 했다.
맨해튼으로 가는 다리 위, 뉴욕의 밤거리가 내려다 보였다. 수많은 보석을 박아놓은 듯 아름답게 빛나는 빌딩 숲이 정말 장관이었다. 순간 피곤함은 사라지고 입은 저절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려고 했지만 보는 것처럼 어디 찍히겠는가 말이다. 어영부영하고 있는 순간 이미 차는 맨해튼의 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차가 할렘가에 들어섰을 때, 선배는 촉각을 곤두세우는 듯 보였다. 이곳은 선배가 아주 오래전에 방문했다가 위험해 보여서 절대로 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많이 깨끗해지고 좋아진 할렘의 거리를 보고는 신기해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임시 경찰서와 경찰들이 많이 보였다. 캐리어를 끌고 불안한 듯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 여행객들도 보였다.
문득 숙소 주인의 했던 말이 떠 올랐다. 숙소의 위치가 정말 좋다고...... 위험한 곳에 있지 않다고...... 주위에 경찰들이 엄청 많다고...... 모순적으로 주위에 경찰들이 엄청 많은 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건물에 도착해서는 잠시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지하철 선로와 버스 정류장이 바로 앞에 보였다. 그리고 같은 건물 1층엔 델리(편의점)도 있었고 주변엔 먹을거리가 많아 보였다.
주인이 내려와서 인사를 나눴다. 작은 체구의 어리고 예쁜 얼굴로 웃는 모습이 너무나 선하고 밝아 보였다.
날 보더니 '어머님은 같이 안 오셨나 봐요?' 하길래 '제가 엄마인데요......' 하니까 너무 놀라면서 '어머, 따님이신 줄 알았어요. 너무 어려 보이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때 선배가 옆에서 키득키득거리더니 '아, 연기 잘하시는데요.' 하면서 농담을 던졌다. 덕분에 다들 웃고 분위기가 더 편안해졌다.
선배는 위험한 동네는 아닌지에 대해서 물었다. 숙소 주인은 앞에 있는 지하철을 기준으로 길 건너편으로만 안 가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잔금을 치르고 키를 받았다. 집 안을 한 번 둘러봐도 되겠냐는 선배의 말에, 숙소 주인은 친구가 자고 있어서 곤란하다고 했다. 수상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이미 그녀를 믿고 있었다. 선배가 잠깐이라도 볼 수 없냐고 우기려 하자, 난 선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괜찮다고 인사를 하며 서둘러 차를 탔다.
차가 출발하자 선배가 내게 말했다. '너 같은 애들이 뒤통수 맞는 경우가 많아. 저 사람은괜찮아 보이긴 하다만......'틀린 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