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선배가 우리를 새 숙소로 옮겨 주고 갔다. 숙소 주인은 이미 마이애미로 떠난 상태였다. 집 안을 둘러보니 방과 거실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고, 좁고 긴 복도 중간엔 욕실이, 복도 끝에는 넓은 공간의 부엌이 있었다. 필요한 살림살이도 거의 다 있는 듯했다. 거실에는 큰 창문이 두 개가 있었는데 밖으로는 수시로 전철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소리가 좀 걱정은 됐지만 창 문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만큼은 너무나 좋게 느껴졌다.
방, 욕실과 부엌 모두 창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창문틀엔 모두 비둘기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낡고 오래된 방조망 같은 것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래도 환기를 위해 창문을 다 닫는 일은 없는 듯 보였다.
방으로 가서 창 밖을 내다보니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보던 좁고 긴 회색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비둘기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따금씩 우린 그들을 그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아주 가까이, 뜬금없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창문을 보면 나와 눈이 마주치는 비둘기들을 발견하곤 했다. 처음엔 식겁했지만 이내 자연스러워진 일상이 되어 버렸다.
방 안의 침대와 이불은 숙소 주인의 것을 빌려 쓰기로 했고, 고맙게도 내가 쓸 엑스트라 매트리스 또한 제공받았다. 다만 불편했던 점이 있었다면 세탁기가 작고 수동이라 매번 바가지로 물을 퍼 넣어줘야 했다는 점과 샤워호스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상하게도 미국 내 여러 호텔을 다니면서 샤워호스가 있는 욕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곳의 문화인가 라는 생각이 살짝 스치면서 꼭 하나 구매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ㅣ메트로카드ㅣ
방은 딸이, 거실은 내가 사용하기로 합의를 보고 간단히 짐을 풀고 선배가 알려준 메트로카드를 구입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은 두 블록 정도로 매우 가까웠고, 가는 길에 스타벅스와 식당들이 많아서 편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트로카드란 뉴욕의 지하철과 버스에서 사용 가능한 교통카드를 말한다. 일회용, 당일권, 7일 무제한 이용권과 30일 무제한 이용권 등이 있는데 우린 고민 없이 30일권을 구입했다. 기기 입력 중 zip code를 넣으라는 란이 있었는데 잘 몰라서 대충 쓰고 나니 순간 걱정이 되었다. 마침 역무원이 옆에 있길래 이거 틀리게 쓴 것 같은데 괜찮냐고 물어봤더니 상관없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말 메뉴도 있더라는......
ㅣ콜럼버스 서클(Columbus Circle)ㅣ
메트로카드를 성공적으로 사고 나니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 내친김에 지하철을 타고 딸이 알아본 어학원을 등록하러 갔다. 1호선을 타고 59번가에서 내렸다. 이곳은 이름하여 콜럼버스 서클(Columbus Circle), 콜럼버스 동상을 중심으로 둥근 광장이 도로 한가운데 있는 곳이었다. 많은 영화에도 출현한 이곳은 주변엔 유명 쇼핑몰과 고급 건물들이 많아서 관광명소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센트럴파크 관광을 이곳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촌사람들답게 '우와~ 멋지다'를 반복하며 즐비한 높은 고층 빌딩들을 연신 바라보며 걸었다. 이러다 목디스크 걸리겠단 생각까지 들었지만 자꾸만 하늘을 향하는 고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내 학원에 도착한 우리는 너무 늦게 와서 학원이 끝난 건 아닌가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담당자가 남아 있었다. 한데 외국인이었다. 잠시 떨렸지만 나의 숨은 영어 실력을 발휘할 때였다. 어쩌고 저쩌고...... 한참 동안 대화가 오고 가고 무사히 등록을 마쳤다. 내가 이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몰랐다.
참고로 미국에선 3개월 동안 유학 비자 없이 어학원을 다닐 수가 있다. 다만 주 15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18시간 풀타임은 유학비자를 받아야만 가능) 보통은 미국에 오기 두어 달 전부터 학원을 등록을 해놓고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학원은 많고 다들 비슷하니까......
오늘의 모든 미션을 무사히 마친 우리는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었다. 숙소 근처에서 보아둔 일본 라멘집으로 향했다. 조금 느끼하긴 했지만 맛있었다. 그렇게 우리들만의 하루가 또 지나갔다.
ㅣ맨해튼의 밤ㅣ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딸아이가 바쁘게 어딘가를 다녀왔다. 알고 보니 혼자서 운동 겸 센트럴 파크 산책을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웬일이지? 혼자서...... 대단한 놈!' 한국에선 쉬는 날엔 절대로 오후까지 눈을 뜨지 않는 아이였다. 아마도 새로운 도시의 기운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심어주었나 보다. 사실 나도 뉴욕에서 조깅 한 번 해보는 것이 로망이었는데 딸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그게 뭐라고...... 내 상상 속에서 조깅하는 뉴요커들의모습은 최소한의 차림으로, 탄탄한 근육을 씰룩거리며, 햇살을 받아 흘러내리는 땀은 Cf의 한 장면처럼 빛나고 있었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롯된 나의 착각이겠지만 말이다.
로망은 로망일 뿐, 현실에서의 난 밤새 온갖 소음에 시달리며 잠을 설쳤고,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태양빛에 늦잠을 잘 수 없었다. 내게 조깅이란 정말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나에게 맨해튼의 밤은 그러했다. 너무나 시끄러웠다. 전철은 그 순환 시간의 길이가 달라질 뿐 24시간 운행했으며, 새벽에는 청소차가, 어쩔 땐 폭주족이, 사이렌은 거의 30분에 한 번씩, 각자의 소음을 만들어 냈다. 밤늦게까지 떠들거나 노래하는 소리쯤은 아주 양반이었다.
제일 참기 힘들었던 건 정부에서 하는 합법적인 도로 보수공사였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꼬박 굴착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이게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미국은 유지보수공사의 나라인 것 같았다. 어딜 가도 공사를 안 하는 곳이 없었다.
우리나라처럼 그냥 밀어버리고 새로 짓기보다는 돈이 더 들더라도 보수공사를 하면서 그의 역사성을 유지하는데 힘을 쏟는 것 같았다. 물론 이곳에서도 지자체 예산 확보를 위해 멀쩡한 곳을 파내기도 한다는데, 뭐 아무튼 수십 년이 지나도록 별로 달라지지 않는 건물들과 거리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지고 왔던 비치타월을 거실 창문에 걸어보았다. 사이즈가 맞춤인 양 딱 맞았다. 햇빛은 대충 막았으나 소음은 어쩔 것인가. Pharmacy에 들려서 귀마개를 사 왔다. 잘 때 착용을 해보니 나쁘지 않은 듯했으나 곧 실패임을 깨달았다. 이명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날카롭고 높은 삐~ 소리가 일정하고 끊임없이 들려오면서 자연스러운 소음보다 더 괴롭게 느껴졌다. 전까진 내게 이명이 있는지도 몰랐다. 귀마개를 던져 버리고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익숙해져야지, 별 수 있겠는가......
ㅣ열쇠 복사ㅣ
딸이장을 봐둔 누룽지와 라면으로 아침식사를 차려 주었다. 어려서부터 나와 무언가를 함께 만들다 보니 제법 요리와 베이킹을 잘한다. 이따금씩 밥도 차려주는 아이가 참으로 기특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린 시내에 있는 홈디포(Home Depot)로 향했다. 딸과 내가 다른 일정을 소화해 내려면 열쇠가 한 개씩 더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검색을 해 보니 홈디포에 키를 1분 만에 복사해 주는 기계가 있다고 했다. 가격은 $3. 실제로 보니 정말 신기했다. 그런데 내가 몰랐던 사실 하나가 있었다. 숙소 문 키는 복사가 되지만 건물로 들어가는 메인 키는 복사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집주인의 특별한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 방법이 없었다. 열쇠 없이 건물에 들어갈 땐 눈치껏 딸려 들어가거나 남의 집 벨을 눌러보는 수밖에......
ㅣ한인타운ㅣ
맨해튼 시내 웨스트 32번가(West 32nd St)에 코리아타운이 있다. 많이 이용하는 전철역으로는 42번가 타임스스퀘어(Times Square) 역이 되겠다. 아마 맨해튼에서 뚜벅이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리게 되는 곳 은 타임스스퀘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맨해튼 대부분의 이동수단이 이곳에서 교차하고 있고, 많은 관광명소들이 이곳에 모여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한인타운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으니 자세한 길은 구글 지도에게 물어보기 길 바란다. 자타가 공인하는 길치인 나도 이 덕분에 혼자서도 잘 다닐 수 있었다.
한인타운은 도로를 따라 쭉 한 길로 이어져 있다. 한국 음식점들, 파리바게트, BBQ, 서점, H마트 등 한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상점들이 많이 있다. 우리도 장을 보고 저녁으로는 BBQ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