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똑.. 또독.. 똑’
언뜻 SOS 모스부호 소리처럼 들리는 이 소리는 우리 집이 내게 보내는 비상상황 알림음이다. 곧 단수가 될 것이라고 주방 싱크대 수도꼭지가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까.
“엇??!! 얼른 씻어!!!”
비상 사이렌 소리처럼 내 목소리가 온 집안을 울려댄다. 남편도 딸도, 하던 일을 내던지고 곧장 욕실로 나뉘어 들어간다.
어떤 사연인가 하면, 외국살이를 하다 보면 으레 당황스러운 상황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가장 당황스러운 상황은 예고도 없이 물이 끊겨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곳 라오스에 정착해 나가던 초반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애먼 수도꼭지를 틀었다가 잠갔다를 반복하며 못살게 굴었더랬다.
한 번은 가족 모두가 개운하게 씻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뒤로 물이 단수되었고 늦은 밤까지 물은 들어오지 않았다. 물이 끊길 것이라는 걸 상상도 못 하고 있던 우리는 습관처럼 변기물을 내렸음이다. 그래도 이제 잘 시간이라서 크게 염려하지 않았으나 복병이 찾아왔다.
바로 딸아이의 복통이었다. 결국 화장실로 향했고 손끝에 기운을 모아 변기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곱게 변기뚜껑을 덮고 화장실 문도 닫고, 자고 있던 환풍기만 깨워 놓은 채 잠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잠이 안 왔다. 아니 못 잤다는 게 더 맞겠다. 속 답답한 변기 생각에 내 속도, 머릿속도 잠 못 들고 뒤척였다.
“딸, 엄마 잠이 안 와” 옆에 누워있던 딸에게 속삭였다.
“왜요?”
“물이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어. 막 상상이 돼. 변기가 자꾸 살려달라는 거 같아” 말이 끝나자마자 딸과 함께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우리 진짜로 기도할까? 물을 보내달라고?” 터진 웃음이 뒤섞여 나온통에 농담 같이 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진지했음이다.
“응.”
누운 채로 딸과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집에 지금 물을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변기도 힘들고 우리가 화장실에서 자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어요.” 기도를 끝내고도 아까 터진 웃음이 딸과 살만 닿아도 다시 터지는 바람에 한참을 ‘킥킥 큭큭’ 거리면서 새고 있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쿠왈콸 쿽쿽쿽’ 요란한데 왠지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 웃느라 붙었던 내 눈꺼풀이 스프링처럼 들려졌다.
‘쿠왈콸~! 쿽쿽쿽쿽!!’ 또 한 번 요란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엄마?!!!” 딸도 확신에 차서 나를 불렀다. 우리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 일어났다. 기적같이 변기 수조에 물이 가득 차기 시작했고 마침내 우린 그 밤, 복병 녀석과의 신경전에서 시원하게 놓였고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렇게 라오스에서의 시간이 흐르면서 물이 끊기기 전이면 나타나는 전조증상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한 거다. 그것은 정중하고 깔끔한 ‘사전 안내 방송’도 아니고 최첨단 ‘단수 알림 시스템’은 더욱 아니다. 그저, 그냥, 집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리기 시작한 거다.
우리 가족이 둥지를 튼 이 집은 1층이고 아파트 전체에 물을 공급해 주는 양수기가 우리 집 바로 옆쪽에 설치되어 있는 구조다. 양수기는 주방 싱크대와 실질적인 거리가 멀지 않다. 양수기에서 물이 빠져나가면서 물탱크에 기압의 변화가 생기고 그 영향으로 주방 싱크대의 수도꼭지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눈여겨보지 못했지만 몇 번의 단수가 반복되면서 알게 된 현상이다.
그랬다. 오늘도 싱크대 수도꼭지가 보내온 비상상황 신호음을 알아차렸고 나는 사이렌을 울려댔던 것이다. 남편과 딸이 각자 성공리에 샤워를 마쳤고 곧바로 나도 안방 욕실로 달려가서 샤워기의 수압을 살폈다. 수압이 낮은 것 같아서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 아니면 못 씻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씻기를 감행했다.
수압이 계속 낮아지면서 헹궈낸다기보다는 머리에 샴푸 거품을 한 줄 한 줄 밀어내는 수준이 되었다.
‘으.. 조금만 더..’
욕심이었을까? 샤워기는 이내 말라버렸다.
‘난 어떡하라고?’...
머리에서 뚝뚝 물이 떨어지고 거품도 떨어지고, 혼자지만 체면도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가족에게 생수를 부탁하려는데 내 호기심이 변기 옆 비데용 수도에 걸렸다.
조금은 처량스러웠지만 곧 비데용 수도를 잡아들고 조심스럽게 눌러봤다.
‘하… 나오네.’
쫄쫄쫄이지만 나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씻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나는 멈춰버렸다.
'... 이 상황에 안심이라니. 게다가 비데 호스 길이에 맞추느라 공손하게 꿇어앉아있는 꼴이라니!’
'풉.'
웃음이 샜다. 그 순간의 나는 낯선 나라, 어떤 욕실, 그것도 변기 옆에 쭈그려 앉아 비데용 호스로 몸에 물을 뿌리고 있는, 새어 나온 웃음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이는 미친 여자 같았다.
씻기를 마무리하고 빨래거리를 가져다 놓으러 베란다에 갔다가 창밖에 양수기를 수리하러 오신 집주인 내외를 만났다. 딱 봐도 젖은 머리에 방금 씻고 나온 것 같은 내 모습을 보고 물으신다. "어떻게 씻었어요? 물이 양수기에 안 차서 소방차 불렀는데." (라오스는 종종 소방차를 불러 물을 보충받기도 하는 것 같다.)
씨익-. 웃어 보였다.
비데로 씻었다고 말씀드릴 순 없었다.
인생사 황당한 일이 이런 갑작스런 '단수'뿐일 리는 없겠고, 이제부턴 시비 걸어오는 인생 '변수'들과 마주 서면 새는 웃음 말고 어깨를 들썩여 비트를 쪼개고 미친년 마냥 진짜 웃으며 상대해 줘야지.
그러다 보면 지난날 변기에 물이 차올라 쾌재를 부르던 것과 비데 호수를 타고 아직 흐르던 물 같은 은혜가 있지 아니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