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믿음인 이유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옹졸한 부모인 나를 하나님과 감히 동일시시키는 신성모독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와도 유사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조금 더 엿볼 수 있는 축복이기도 하다.
때로는 기뻐하시고, 때로는 분노하시고, 탄식하시고, 절망하시고, 희망을 가지시는 그분의 다채로운 마음을 성경 속에서 접하면, 도대체 그분의 MBTI는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선과 악 사이에서 냉철한 T 이시다가도, 때로는 희로애락이 분명하시니 보나 마나 F 이실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도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 함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아이에게 분노하지 말고, 팩트를 짚어 훈육하라고 하지만, 매번 훈육을 넘어 나의 짜증이 뒤섞인 잔소리로 아이들을 다그치는 경우가 많다. 부모도 감정이 있으니 자녀 때문에 섭섭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어제도 그러했다.
유행에 민감하고, 쇼핑을 좋아하는 기분 파 우리 딸. 거의 99.9% F 성향을 갖는 이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보면, 지쳐 짜증 내고 화내는 일이 다반사이다. 어제 이 아이가 친구랑 같이 밖에 놀러 가지 못했다고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었다. 저녁이 되어 나라도 같이 나가달라고 한다. 근처 대형 팬시용품샵에서 친구들과 선생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싶다고 한다.
너무 피곤해서 한 발짜국도 움직이기 싫었다. 엄마도 피곤하니 내일 가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니, 시무룩한 표정을 보이더니 얼굴을 베개에 처박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안쓰럽기도 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래, 가자!”
그 한마디에 신이 나서 옷도 챙겨 입고, 자기 가방과 지갑도 챙긴다. 대형팬시용품샵에 다다르니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다. 여기저기 사람에 부딪히니 피곤함이 배가 된다. 무언가 나도 즐거울 거리를 애써 찾으며 하나하나 눈요기라도 해본다. 이 아이는 친구들 선물은 또 뭘 그리 많이 사는지……. 그래도 기 좀 팍팍 살려줘 보리라 하고 큰맘 먹고 사고 싶은 대로 마음껏 골라보라고 했다.
“네, 다 합해서 오만육천 원입니다.”
요즘 애들 문구가 뭐 이리 비싼지, 카드를 내미는 손이 조금 떨려온다. 아이의 기분을 살려주려고 한 일이니, 당연히 나의 기쁨은 아이의 기쁨이다.
내 딸을 위해 쓴 돈은 크게 아깝지 않다. 그저 기뻐하며 ‘엄마 오늘 그래도 엄마랑 쇼핑해서 기분 좋아! 감사해요.’ 이 한마디 해주면 그것이 나에게 더 큰 기쁨으로 오늘의 이 시간이 아름답게 마무리될 것 같다.
하지만, 아이 표정은 생각만큼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다. 당연히 엄마가 사 주어야 한다는 표정에 살짝 김이 셌다. 곧바로 아이는 옆에 있는 액세서리 샵으로 들어간다.
이 아이의 목적은 사실 선물을 쇼핑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얼마 전 귀를 뚫었으니, 예쁜 귀걸이를 몇 개 골라서 빨리 그것으로 바꾸는 것에 있었다.
고속터미널 상가에서 파는 알록달록한 귀걸이들에 마음을 빼앗긴 이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의 마음은 귀가 아직 더 아물고 나서 귀걸이를 바꾸는 게 안전하고, 또 자칫 싼 귀걸이를 잘못하다가 귀에 염증이 생길 수도 있으니, 아직은 처음에 한 것을 빼지 않고 아물 때까지 더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금속알레르기로 고생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애초에 딸이 귀를 뚫는다는 것 자체가 탐탁지 않았지만, 도무지 못 말리는 딸내미다.
물론 그까짓 귀걸이 사줄 수 있다. 마지막까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원 없이 해주고도 싶다. 하지만 기왕 사주는 귀걸이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곳에서, 더 좋은 것으로 사 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이에게 지금 새로운 귀걸이를 사는 것을 미루고, 조금 더 있다가 백화점에서 좋은 것으로 사주마 하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다.
그때부터 이 아이의 표정은 시무룩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불만이 가득해져서 입이 댓 발 나왔다.
자기 생각에는 귀가 다 아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금속알레르기가 없단다. 다른 금속으로 해 본 적도 없으면서 금속알레르기가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확신하는 것인지. 이래 저래 설득해도 도무지 안된다.
돈의 문제를 떠나, 저 아이의 귀 상태를 엄마인 내가 객관적으로 더 잘 볼 수 있는 것인데, 저 아이의 표정을 보니 나 역시 섭섭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온 보람도 없으니 나 역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설득해 봐도 자기 생각에 꽉 차 있는 이 아이를 보며, 도대체 내가 왜 이 아이를 설득하고 있는지 더욱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저를 위해 저녁에 함께 나와서, 함께 친구들 선물을 고르고, 그 선물을 사 준 것은 전혀 기뻐하거나 감사해하지 않는다. 당장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그 얼굴을 보자니 나의 말투는 점점 설득체가 아닌 분노체가 되어 갔다. 결국 나는 주변 사람들 아랑곳하지 않고, 길바닥에서 명령조로 훈계하기 시작했다. 저를 위해 해 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이 갖지 못한 단 한 가지에 불평불만 가득해진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 대 인간으로 섭섭하고 화가 난다. 나의 분노에 아이는 점점 더 시무룩해지고 불만에 찬 모습이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 잔소리는 그칠 줄 모른다.
“엄마가 너한테 해 준 것은 하나도 기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니? 내가 너 그거 귀걸이 하나 못 사게 한 게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 조금 더 귀가 아물면 제대로 된 거 사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
길에 오는 내내 쏟아지는 나의 분노에 아이도 조금 위축되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왜 저를 이해하지 않느냐는 눈빛을 볼 때마다 다시 내 입에서는 짜증 섞인 말들이 튀어나온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아무 말도 않은 채 씻고 잠자리에 든다. 잠든 아이를 보며, 분을 삭이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요즘 아이들 부모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던데. 내가 우리 애들을 너무 기를 꺾나. 안쓰러운 마음도 들기 시작하고. 엄마한테 한소리 듣고, 사고 싶은 귀걸이는 귀걸이대로 못 사서 속상해하는 그 마음이 조금은 보이기 시작했다. 함께 즐겁게 쇼핑하고 올 수도 있었는데, 이 모든 일정을 망친 그 작은 한 가지의 욕망에 나도 속상했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그분 앞에서의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하나님은 나처럼 속이 좁아 잔소리를 퍼부으시거나, 화를 내시지는 않으셨지만, 분명히 섭섭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 역시 하나님께서 해 주신 더 크고 많은 은혜들에 대한 기쁨과 감사보다는, 너무나 간절한 소원 하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더 많이 했었다. 그 소원이 그분께서 보시기에는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서, 때가 안 된 것이라서,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으로 주고 싶으셔서, 내가 보지 못하는 이유들이 있으신 것인데,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뚱해 있을 때, 그분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기 시작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왜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는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것은 명령이셨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모든 시간을 기쁨으로 채우고 싶으신 것이다. 함께 즐거운 기억들을 만들어 가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늘 많은 것을 채워주고 싶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지 않으시는 것들은 아까워서가 아니라,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만약 우리 딸이 내가 지금 당장 싸구려 귀걸이를 사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그날 나와 함께 쇼핑 한 하루를 기뻐했으면, 우리의 모든 시간들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소원의 불발로 불평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모든 기쁨과 감사의 시간도 함께 망쳐져 버린다.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분은 나의 삶 속에서 함께 기쁜 이야기를 써 나가고 싶으시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믿는 믿음의 행위가 바로 기쁨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를 고통으로 밀어 넣으시지 않으시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작은 우리가 어찌 그 큰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우리를 불만족의 그늘에서 실망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물론 우리는 그 큰 뜻을 헤아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반복하여 설명하신다. 더 크고 놀라운 은혜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을 말이다. 그 엄청난 큰 은혜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할 이유가 충분한 것인데, 우리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느껴지지 않고, 설명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느끼고 싶지도 않고, 설득되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오로지 내 생각만이 맞고, 그것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뾰로통하게 입이 나와있는 나의 모습은 딱 오늘 우리 딸이 나에게 보여 준 모습이었다.
결국,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명령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따뜻한 설득이었던 것이다.
‘내가 너한테 해준 더 큰 것들을 바라봐.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고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왜 기뻐하지 않니? 네가 지금 갖고 싶은 그것을 내가 주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어. 그런 내 마음을 들어줘. 우리 함께 기쁜 추억만 만들자. 너의 생을 나와 함께 기쁜 기억들로만 채우자. 그게 그렇게 어렵니? 네가 실망한 표정을 보니 나 역시 많이 속상하구나.‘
‘네, 하나님, 간절한 것을 하나하나 채워지지 못했을 때, 슬퍼하고, 실망하고, 속상해하던 제 모습에 많이 속상하셨겠어요. 그래도 저처럼 잔소리하거나, 화내지 않으시고 가만히 기다리셨던 주님. 오늘의 이 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제 얼굴에 기쁨이 사라지려고 할 때마다 다시 오늘의 저의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