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열이 오래 걸리는 아이
때는 우리 큰아이가 7세였던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치원 상담을 마치고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전업주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던 나는 누구보다 우리 아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발달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한 번도 아이가 시기를 놓친 적이 없었다. 매년 있었던 영유아 건강검진에서도 평균 이상으로 잘 커나가고 있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 이전해 까지 선생님들도 늘 아이가 잘한다고 이야기해 온 터였다. 그러나, 그날 상담은 처음으로 우리 아이가 평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하였다.
“어머님, 우리 윤호가 뭐든지 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알고 계시죠?”
확실히 우리 아이는 움직임이 느리기는 하다. 아침에도 아이를 등원시키다 보면 진이 다 빠졌다. 양말을 신고 있는가 보면 한참 동안 양말을 이리저리 돌려서 겨우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발을 밀어 넣는다. 양말 한 짝 신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5분 소요. 그 마저도 양말을 신다가 갑자기 인형을 만지작 거리기도 하고. 아무튼 무언가 한 가지를 완성하는데 0.2배속 동영상을 보는 것처럼 느리다. 엄마인 내가 가장 속이 터지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한 가지 활동을 시작하면 거기에 몰두해서 다른 활동으로 넘어가지를 않아요.”
“그나마 자기가 좋아하는 수학 활동은 조금 빠른데, 빨라도 다른 아이들 속도와 비슷한 정도예요.”
“그림 그리기 활동 시간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게 있어요.”
“일기를 쓸 때도 마찬가지고요.”
“이러면 초등학교에서 적응하기 힘들 거예요. 최소한 알림장 정도는 써야 할 텐데. 쓰는 속도가 영 느려요. “
지나친 유아 선행 교육에 대해서 유난히 부정적으로 생각했었던 나는 아이와 유치원 때 정말 많이 놀았다. 한글 쓰기는 학교 가기 전에 어느 정도만 맞추면 될 것 같아서 유치원에서 배우는 정도로 만족했다. 아이가 지능에 문제도 없는데, 굳이 어렸을 때부터 스트레스받을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에 참으로 당당했다. 이러한 나의 태도를 유치원 선생님이 나서서 걱정을 해 주기 시작했다.
“적어도 일기 쓰기는 학교 가기 전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쓰게 해 주셔야 학교에서 적응할 수 있어요. 요즘 다른 아이들 이미 5세부터 쓰기 다 할 줄 알고, 영어도 다 하는데, 기본적인 것은 조금 해 주셔야 할 텐데요. “
상담을 마치고 돌아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우리 애는 선행을 안 해도 때 되면 잘할 것이라는 고집 섞인 반감과, 내가 너무 그동안신경을 안 썼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섞여 뱅글뱅글 돌았다.
‘지금이라도 학습지라도 시켜볼까? 아니지, 나는 소신 있는 엄마야.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아.’
결국 글쓰기, 수 연산, 영어, 남들 다 하는 학습적인 사교육은 다 빼고 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운동, 음악과 같은 예체능과, 여행에 초점을 두었다. 그렇게 해도 우리 아이는 학교에 입학할 때 한글을 쓰고 읽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수 연산도 제법 잘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 그 정도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아이가 어느 날부터 ”나는 못해 “를 입에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애들이 영어를 다 잘해.”
“애들이 수학도 나보다 훨씬 레벨이 높아.”
“애들이 다 일기도 잘 써와.”
우리 아이가 늦은 것이 아닌데, 졸지에 늦은 아이가 되어 버렸다.
행동이 느린 아이의 기질은 아이를 더 부진아처럼 보이게 했다. 쓰고, 그리는 것이 학교활동으로 주어지면 아이는 한참을 생각하고 있는데, 이미 수업시간이 끝나고 완성품을 걷는다. 늘 백지상태인 아이의 활동지는 선생님에게 우리 아이가 부진아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이 스스로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더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의 소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아 때는 언어로 배우는 세상보다는 실체를 통해 배우는 세상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나의 이상적인 교육관이 우리 아이가 시작도 해 보기 전에 자존감을 잃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더 큰 반감으로 이 나라 교육 체계에서 아이를 꺼내고 싶었다. 마치 지금의 입시제도에 맞서 싸우는 외로운 잔다르크처럼 외쳤다.
“사교육에 미치도록 방관하는 이 나라의 입시제도가 잘못된 거지, 우리 아이는 잘못이 없다! 나는 차라리 모두가 달리는 입시제도를 벗어나겠다!”
그렇다. 나의 목표는 아이들을 명문대에 보내는 것이 아니다. 나의 목표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펼치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잘 살아가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교육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찾고 펼치려면 당연히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의 재능, 기질, 성향 등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
흔히 말하는 자랑할만한 입시결과를 보인 것도 아닌, 현재 진행형인 아이의 이야기를 무슨 용기로 세상에 드러내려고 한 것일까? 내가 만약 우리 아이가 명문대에 가고, 그 이후에 이런 글을 쓴다면 더 호응을 받을 수 있을 테지만, 나의 목표는 아이의 명문대 진학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이의 입시 결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아이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쓰기로 했다. 아이가 설령 명문대에 가더라도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아이가 노력한 결과일 터인데, 그것을 내가 가로채서 글을 쓰는 것은 내 글의 설득력을 잃어버리는 일일테니 말이다.
결국, 지금 내가 쓰는 글은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과정론적인 이야기이다. 아이의 배움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엄마는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지켜보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의 느린 아이들은 느린 것이 아니다. 생각이 깊은 것이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아이들이다. 더 이상 아이들이 비정상인 것처럼 내몰아서는 안된다. 비정상적인 것은 영유아기 때부터 빨리, 많이를 외치는 현 사교육 시장과 그것에 올라탄 부모의 불안감이다. 우리는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나의 글이 우리의 불안을 떨쳐내 주기를 바란다. 경쟁에 내몰리는 많은 느린 아이들을 살리는 글이 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