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나와 우리 엄마의 교육관은 '강남 8 학군 키즈'라는 단어의 자극성이 무색할 만큼 교육에 진보적이다.
90년대 강남의 8 학군도 지금 못지않게 교육열이 심했다. 지금은 그 연령이 훨씬 어려지고, 공부량도 많아진 것은 사실이나, 그 당시에도 몇 년씩 선행하는 것이 유행했었고, 영어 조기교육 열풍을 타고 윤**, 시*영어사 등의 브랜드들이 활개를 쳤다. 강남 8 학군지에서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보낸 나는 학원과 과외 스케줄로 빡빡하게 짜인 시간표 속에서 달리는 아이들을 여럿 친구들로 두었다. 그 가운데에 유독 우리 부모님만 선행학습에 관심이 없었다. 때가 되면 다 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아이가 스스로 하는 것 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무엇보다 좋은 학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살아가는 지혜가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셨다. 무엇이 엄마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게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때부터 엄마는 학벌이 인생을 좌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렇다고 교육에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서점에서 나와 동생이 원하는 책은 원 없이 사주셨고, 배우고 싶다고 하는 것이 있다면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단지 그 모든 교육이 꼭 성적에 국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하셨다. 그런 엄마 덕에 강남 8 학군에서 자라면서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랄 수 있었고,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정보가 공개되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름아름 그룹을 지어 과외 선생님을 불렀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지금보다 아름다웠던 것은 좋은 정보를 혼자만 알지 않고, 서로 공유하는 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옆집 아주머니는 교육에 도통 관심이 없는 우리 엄마가 안타까웠던지, 여러 과외에 나를 끼워 주셨다. 아주머니 덕분에 영어, 수학, 과학 과외를 중학교 들어 처음 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과외를 회상하면 어머님들의 그런 수고가 얼마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었는지 알려드리는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그룹과외로 모인 아이들은 그곳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같은 학원과 과외로 묶인 아이들은 선생님을 구슬려 그 시간을 알차게 노는데 활용한다. 뒤늦게 합류한 내가 열심히 수업을 들을라치면 선생님한테 첫사랑 이야기를 조르거나, 선생님을 괴롭혀 수업에 훼방을 놓는다. 과외 선생님들은 이미 그런 수업 분위기에 익숙하신지 대충 시간이나 때우고 가기 일쑤다. 어린 내가 보아도 돈과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결국 나는 그 그룹 과외에서 빠지고 싶다고 엄마에게 이야기하였고, 스스로 공부를 해 보겠노라 했다.
스스로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 당시의 나에게도 시원한 반전은 없었다. 스스로 공부를 한다고 갑자기 성적이 확 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과외를 했을 때 보다 큰 차이로 성적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과외를 했던 그들은 어떤가? 그들의 성적이 대단히 좋았는가? 그렇지 않았다. 고등학교, 그 이후에도 그들이 대단하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성적은 그렇게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면, 성적 외의 부분들은 어떤가?
고등학교 시절로 올라가 보면 초, 중학교부터 선행학습으로 달려온 아이들 중 대다수가 고등학교 성적이 떨어져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는 했다. 그중 많은 아이들이 부모님과의 갈등을 심하게 겪고, 작게는 마음의 우울감을 호소하거나, 크게는 자살기도까지 하기도 했다. 똑똑한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부모의 기대에 미치기 위해 말 그대로 미쳐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친구들에게 우리 집은 비밀 아지트였다. 가게일로 바빴던 엄마는 항상 집을 비웠었는데, 그런 우리 집은 그녀들에게 안식처와도 같았다. 우리 집에 와서 좋아하던 연예인 콘서트 영상도 보고, 드라마도 보며 힐링을 하고는 했다. 그러니 그녀들의 어머니들께는 나와 우리 엄마가 별로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녀들을 우리 집에 발을 못 들이게 하려면 할수록 그녀들은 우리 집으로 더욱더 숨어들었다.
그녀들은 마냥 일탈을 저지르려는 나쁜 아이들이 아니었다.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며, 부모를 기쁘게 하고 싶어 하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겠지만, 강남 8 학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나의 많은 친구들은 대입에 실패하면서 큰 좌절을 겪거나, 대입에 성공을 해도 그 인생이 쉽게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좋은 학교에 못 가면 못 가는 대로 좋은 학교로의 편입이나 재수를 하기 위해 여러 해를 방황하기도 하고, 좋은 학교에 가면 가는 대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녀들의 인생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지혜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는 한다. 제때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고, 무던히 사회생활을 해 나가고, 제때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 평범한 삶을 살아내는 힘은 지혜와 건강한 정신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엄마의 ‘잘 살아가는 지혜가 중요하다’는 교육관이 여러 세대를 앞서 있었다고 감탄하게 된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는 목표가 무엇일까?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 아이를 통해서 내가 명예롭고 싶은 것은 아닐까?
‘우리 아이를 서울대에 보냈어요.‘라는 타이틀은 아이를 통해 내가 서울대를 보낸 부모가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 아이의 인생은? 행복은? 서울대만 가면, 의대만 가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물론 반대의 경우만이 아이가 행복하다고 단정 짓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이가 적절한 교육을 받고, 자신의 앞가림을 하고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은 부모의 마땅한 도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아이들을 주체적인 존재로 인정해주고 있을까?
더 빨리, 더 많은 교육을 받아야만 대학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지금, 우리 아이들은 다시 내몰리고 있다. 아이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라고 하지만, 아이들의 목소리에 조금은 귀를 기울여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아이들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아이를 키워내는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아이들은 생각이 없지 않다.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기 위해 더 애쓰고 참을 줄 아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미래를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자. 이제는 과거보다도 아이들의 사교육이 영유아기로 더 바짝 당겨졌다. 이미 유치원 때부터 빡빡한 스케줄을 허겁지겁 달려가는 아이들에게 미래를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과연 이 아이들이 얻고 있는 지식 만큼 세상을 살아가는 힘과 지혜도 얻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학벌만이, 직업만이 행복을 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