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사’ 자 타령할 거야
의대 정원 확대 발표에 따라 재수생, 직장인들이 의학전문대학원 입시 학원가에 4천 명이나 몰렸다는 소식을 접하며 도대체 ‘의사’가 뭐길래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일까 의문이 든다.
물론 타 직종보다 고소득 전문직인 것은 맞겠지만, 이런 현상이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공부’에만 목숨을 거는 이유가 ‘돈’ 때문일까?
물론 좋은 학벌이 대기업으로, 좋은 직업으로, 좋은 벌이로 연결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이것이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다.
그 결정적 계기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 전 장에서 잠시 언급했었던 우리 친정엄마가 하셨던 일에 대해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자동차정비소를 운영하셨다. 지금 21 세기에도 자동차업계를 여자가 해 나간다는 것이 희소한데, 90년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자동차 정비기사를 직접 하신 것은 아니었고, 자동차 정비소 사업을 운영하셨다. 아버지의 사업이 불의의 사고로 위기를 맞았을 때, 엄마가 자동차 보험 대리점 영업사원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자동차 업계로 사업 영역이 확장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엄마가 했던 이 정비소는 ‘공’과 ‘상’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
코 끝을 찡하게 하는 기름냄새와 귓가를 때리는 망치와 임팩트드릴 소리, 일하는 아저씨들의 거친 목소리, 진상 손님을 대하는 엄마의 외로운 싸움, 이런 것들이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우리 엄마의 일터였다.
이미 이때부터 어린 나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선명하게 보였다.
‘선비’, ‘농인‘, ‘공인’, ‘상인’의 순으로 귀천을 나누었던 조선시대 신분제의 뿌리는 아직도 우리의 머릿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정비소에 오는 손님들이 정비소의 아저씨들에게, 우리 엄마에게 대하는 태도와 말투에서 알 수 있었다.
현대 사회의 선비들, 소위 공부를 많이 하고 ‘사’ 자 직업을 갖는 사람들이 손님으로 오면 정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일단 무시한다.
어느 사모님이 자신의 초등학생 아이에게 우리 정비소에서 일하는 아저씨를 보고 대놓고,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런 일 하면서 살아야 한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나 역시 별 위화감 없이 수긍하고 있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세월이 지난 지금 도대체 그 ‘저런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무례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구나 라는 생각을 해 보지만, 우리 아이에게 그 일을 시키고 싶다는 말은 차마 자신 있게 하지 못하겠다.
지난 몇 년간 부모님을 도와 정비소를 운영했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나를 대놓고 하대하듯 ‘아가씨’라고 부르는 어르신들, 나보다 20살은 많아 보이는데 눈을 내리깔고 ‘언니’라고 부르며 은근하게 반말을 섞는 사모님들, 우아한 척하면서 어떻게든 꼬투리 잡아보려는 젊은 아가씨들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이 윗 계층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어 했다. 만약 내가 다른 자리에서 그들을 만났어도 그들이 그랬을까?
배우고 싶은 거 원 없이 배웠고, 먹고 싶은 것 먹을 만큼 먹었고, 가고 싶은 곳 갈 만큼 가 보았을 만큼 충분한 삶을 살고 있지만, 사람들을 계층화하는 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었다. 바로,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느냐였다.
현대사회에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아무리 영혼 없이 떠들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은 우리의 직업이라는 사실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사’의 높은 클래스에서 우아하게 사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 그것을 위해 그렇게나 우리는 너도 나도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 뿌리 박힌 사상이 바뀌지 않는 한 대입구조를 아무리 바꿔도 사교육 문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어떤 입시제도가 도입되어도, 사람들은 ‘사’를 향해 달려갈 것이고, 그것을 위한 더 신박한 형태의 사교육만 양산될 것이다.
첫 장에서 나의 목표는 우리 아이들의 명문대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학벌보다는 살아가는 지혜를 키워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다. 순진한 생각이다.
나 역시 누구보다 잘 안다. 아직 이 사회는 직업이 그 사람의 귀천을 평가한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어떤 직업을 가져도 흔쾌히 응원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쉽게 자신할 수는 없다. 직업에 따라 사람들이 어떤 색안경을 끼고 보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부터 보는 눈을 바꾸려고 한다. 진정 직업에 귀천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의 시선이 바뀌고, 누군가의 시선이 바뀌고, 한 명 한 명의 새로운 시선이 늘어날 때 우리의 뿌리 깊은 ‘사농공상’의 사상도 조금씩 옅어지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의 시선이 바뀔 때가 되었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