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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Mar 19. 2024

조바심의 노예, 나도 강남 엄마?

아이들의 사춘기를 맞이하는 엄마의 자세


느린 아이, 느리게 가자, 느리게 가도 할 수 있어!  엄마들에게 희망을 주자! 아이들을 살려주는 글을 쓰자!

그 다짐을 한 지 4주 만에 무너져 버렸다.

'선행, 현행도 아닌 후행'을 연재하기로 하고, 우리 아이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 가면서 늦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선행에 의존하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 그 가운데에서 한 걸음씩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내 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목차도 다 준비되어 있었다.

사교육 광풍이 불고 있는 현 상황을 꼬집은 이야기를 서론에, 우리 아이들과 놀며 보냈던 주옥같은 영유아기 시절과, 우리 아이와 함께 학교에 대해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치열하게 대화했던 이야기, 아이의 학교를 옮긴 이야기 등을 본론에, 늦게 가도 괜찮더라는 이야기를 결론에 쓰려고 완벽하게 계획을 짰다.


그런데,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역시나 주제넘은 이야기였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그렇게 되뇌며 한 해 한 해 지내왔는데, 막상 큰아이가 중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니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렇게 다른 아이들이 뭐 하는지 신경도 안 쓰고 걸어왔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아이만 구멍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글쓰기도 어려워하는 것을 보니 논술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수학머리는 있다고 하는데 학원을 간 적이 없으니 평범한 아이들보다도 진도가 느렸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 여유를 부려왔는지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내가 과연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글을 써도 될까? 그런 글을 쓸 자격이 될까?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내렸다, 모니터의 글을 썼다 지웠다. 도저히 아이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었다.

내 목적이 아이들 대입이 아니라며, 그래서 그렇게 호기롭게 글을 시작한 것 아닌가?

하지만 대입이 다가오니 길을 잃고 초조해졌다.


둘째 아이가 불안해하는 나에게 한마디 던진다.

“엄마, 요즘 티브이에서 나오는 강남엄마 같더라. 우리 막 공부 시키려고 하고!”

어이없는 한마디에 나도 한마디 지지 않는다.

“뭐? 엄마가 너네 언제 공부는 시켰냐? 동네 엄마들에게 물어봐라! 내가 너 공부를 시키는 건가. 초등학교 5학년에 학교 끝나면 피아노 학원 다니는 게 전부인데. 이게 공부야? “

어이없는 사춘기 초입 둘째의 칭얼거림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요즘 내가 아이들을 다그치는 빈도가 잦아든 것은 사실이었다.


우리 큰 아이의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이 아이는 행동도 느리고, 학습도 느리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짜 맞춰진 것이 아니면 좀처럼 밖으로 내놓지 않는다.

이런 아이의 성향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숙제 하나를 몇 시간 동안 씨름하는 모습을 보며 탐구심이 강한 것이라고 인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그저 멍 때리고 있는 것 같거나, 한참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여지없이 나의 참을성은 무너지고 만다.

“집중 좀 하자! 시간 안에 하는 연습도 해야지!”

그런 아이를 다그치지 않으려고 해도, 밤늦게까지 숙제와 씨름하는 아이를 보면 칭찬보다는 한숨과 짜증 섞인 말이 먼저 나가 버린다. 나도 피곤하기도 하고 말이다.


책상 앞에 앉으면 숙제에 머리 예열 시간이 정말 긴 아이.

작년에 매일 12시까지 숙제와 씨름하던 첫째와 같은 분량의 숙제를 하고 있는 둘째는 1시간도 안되어 끝내 버린다.

이러니 내가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 오롯이 모든 시간을 집중해서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고, 예열이 오래 걸리는 것을 보기가 너무 괴롭다.

옆에 있으면 잔소리가 쏟아져 나오니 일부러 아이가 공부하는 방을 피해 있는다. 그러면 나를 자꾸 끌고 들어온다.

”모르겠어 “라고 하는 모습에 또 화가 치민다.

“생각을 좀 해봐. 무조건 모른다고 하지 말고!”

그렇게 아이를 다그치면 아이는 또 끙끙거리고, 나는 화를 삭이고…….


이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간다.

해야 할 학습량은 늘어만 가는데, 아이의 속도는 점점 더 더디다.


‘저 아이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그래.’

‘아이를 이해해 주자. 성향을 받아들이자.’

라고 되뇌어도, 아이에게 모진 말만 나간다.


“내가 너 공부만 하라고 하니? 지금까지 여태 학원도 안 다녔었는데, 이제 학원 좀 늘렸다고 하기 싫다고 멍 때리는 거야? 글 쓰는 종이만 보면 경기를 일으켜, 그나마 좋아하는 수학이라도 잘해보라고 했는데, 그것도 싫어. 너는 도대체 뭐가 될 거니?”

사춘기의 문을 열려고 하는 이 아이는 토라져 되고 싶은 게 없단다. 그러면 나도 지지 않고 소리친다.

“다 때려치워! 네가 하기 싫은 공부를 엄마 위해서 하니? 때려치우라고!”


아직 너무 착한 아이인데, 그렇게 모진 말들을 내뱉고 만다.

이런 내가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있는지 깊은 고민에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분명 아이의 성향을 이해해 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열린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중학생의 나이가 되니 나도 모르게 조바심의 노예가 된 것이다.


주변에 하나둘씩 아이들의 진로가 구체화되어 가는 것들이 보인다.

누구는 국제중학교에 입학했다고 하고, 누구는 경시대회에서 상을 탔다고 하고, 누구는 예중에 갔다고 하고, 누구는 학교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아이만 제자리에 있는 것 같다. 아이의 진로에 대해서도 길을 잃었다. 꼭 한국 입시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주장해 왔는데, 그마저도 대안이 희미해지고 있다.

이런 불안감이 갑자기 몰려올 줄은 올해 초반 글을 연재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약 한 달간의 혼돈 속에서 그래도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게 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길을 나의 좁은 견해로 국한 지어놓고 불안해하지 말자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해 주제넘게 논할 수 없다고 생각해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 글은 애초에 교육에 관한 글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써야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 나는 입시 전문가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의 길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다. 지혜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사춘기가 도래하고 있다. 내가 열린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꽉 막힌 엄마였다는 것을 점점 느낀다.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과 행동들에 숨이 턱 막힌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아니라고 하면서 입시에 초조해하는 엄마의 모습은 꼰대 그 자체일 것이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 대화하지 말고 선배 엄마들과 대화하라는 조언이 생각난다. 그렇다. 지금 당장 급한 것들이 멀리 보면 별 것 아닌 게 된다.

친구 엄마, 10년 선배 엄마들의 시선과, 20년 선배, 30년 선배 엄마들의 시선은 천지차이다.

좁아진 시야를 다시 넓히는 작업을 해야겠다. 다시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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