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채소가게에 들렀다. 트럭 한 대가 가게 출입구 옆으로 상자를 잔뜩 내려놓고 떠나고 있었다. 남자 직원이 그중 하나를 열어 매대에 쏟아부었다. 젖은 흙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유콘 감자요! 지금 막 도착했답니다!"
연거푸 상자를 열며 남자는 외쳤다. 감자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노란빛의 얇은 껍질은 축축하게 젖어 솜털처럼 일어나 있다.
"파운드 당 99센트! 쌉니다! 아주 싸요!"
삽시간에 사람들이 몰려 너도나도 감자를 담아간다. 나도 그 속에 섞여 한 봉지 가득 감자를 채워 들고 나왔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감자를 먹는다. 길쭉한 돌덩이처럼 생긴 미국산 러셋 감자는 감자튀김용이다. 자주색 감자와 보라색 감자도 있다. 겉보기에 비슷해 보이는 감자라도 품종이 달라 각기 다른 이름이 붙어있다.
유콘 감자는 캐나다 산 감자다. 오로라로 유명한 유콘 주의 특산품이다. 모양은 한국에서 먹는 감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적당한 크기에 동글동글하고 노르스름한 껍질과 하얀 속살을 가지고 있다. 유콘 지역의 감자 수확은 8월부터 시작이다. 그러니까 지금 나오는 유콘감자는 올해 처음 수확한 햇감자인 셈이다.
"햇감자가 나왔네!"
한 봉지 가득 감자를 사들고 오니 언니가 좋아한다. 언니는 구황작물 킬러다. 특히 감자와 옥수수를 좋아한다. 반면 나는 구황작물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그래도 이맘때 나오는 유콘 감자는 썩 먹을 만하다.
주먹만 한 노란 감자를 한솥 가득 쪄낸다.
잘 쪄진 감자를 반으로 가르자 파스스 분이 오른 뽀얀 속살이 드러난다. 입에 넣으니 치아가 닿기도 전에 부스러진다. 꼭 밀랍이나 버터처럼 녹아내린다. 맛은 구수하면서 달짝지근하다.
열두 살 된 내 늙은 개는 입맛이 어찌나 까탈스러운지 감자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개가 사랑해 마지않는 고구마조차 잘 먹지 않았다. 버터나 다름없는 풍미의 햇감자라면 먹을까 싶어 입에 갖다 대주었지만 역시나 냄새를 좀 맡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반면 솔이는 한번 맛보더니 입맛을 다시며 더 달라고 조른다.
솔이는 얼마 전 돌아가신 형부의 어머니가 키우던 개다. 열 살 된 보더콜리 암놈으로 원래는 형부의 남동생이 맡을 예정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안 그래도 소심한 성격의 개는 주인이 사라지고 갑자기 낯선 집에서 지내게 되자 기가 팍 죽어 있었다. 밥도 영 시원찮게 먹었다.
그런 솔이가 감자를 한입 맛보더니 더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침까지 질질 흘렸다. 반가운 마음에 감자 큰 것 하나를 쪼개어 그릇에 담아주었다. 게눈 감추듯 해치운다. 다 먹고 나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식탁 위 양푼에 남은 게 없는지 기웃거렸다. 햇감자의 위력은 대단하다. 슬픔에 젖은 개의 입맛도 돌아오게 할 정도다.
이제 시작된 유콘 감자의 수확은 가을까지 이어진다. 햇감자가 들어가기 전까지 부지런히 사다 날라야겠다. 주인 잃은 솔이를 위해서다. 감자 먹고 기운을 차렸으면, 세상 떠난 전주인일랑 어서 잊고 새 집에 적응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