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혼자됨, 그 날것의 모습
할머니가 세상을 뜨고 캐나다 서부 외곽도시의 작은 아파트가 유산으로 남겨졌다. 나는 소설을 쓰겠다며 직장을 때려치운 지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대학원 산하의 소설 창작 전문가 과정을 다니며 습작을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무럭무럭 자란 것은 글쓰기 실력이 아닌 열등감이었다. 세상에는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넘쳐났다. 더 소름 돋는 건 그들조차 등단에 거의 실패한다는 사실이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고,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들었다.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어서 한동안은 책상 앞에 앉아 글 몇 자 끄적이는 시늉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표류하는 배처럼 희망이 사라진 일상 위를 둥둥 떠다녔다. 캐나다에서 살아보겠냐고 아빠가 물었을 때, 짙은 안개를 뚫고 저 멀리 등대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저 불빛을 따라가면 어딘가 닿을 수 있겠지― 약간의 안도감과 자포자기한 심정이 뒤섞인 채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도망치듯 떠나왔지만 그 어디에도 도피처는 없었다. 나는 한순간에 거대한 톱니바퀴 속 작은 부품으로 전락했다. 거주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나라에 꼭 필요한 노동자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에 직업 선택의 폭은 좁고 제한적이었다. 낯선 문화와 언어를 익히고 학교를 다니고 자격증을 따고 취업을 했다. 신분 보장과 비자 지원이 직장을 통해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직의 자유는 없었다. 과중한 업무와 불합리한 처우도 감수해야 했다. 모든 과정마다 마감과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단번에, 한 번에, 즉시, 실수 없이―를 끊임없이 되뇌어야 했고 산 하나를 넘으면 곧바로 다른 산이 나타났다. 늘 쫓기는 기분이었다. 기계 부품이 아닌, 그저 인간으로 존재해도 좋다는 합법적 허락을 얻기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고국에서 당연하게 여기며 누리던 권리는 사실 당연한 게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걸 깨닫게 된 것이다. 덕분에 전보다 훨씬 겸손해졌고, 과거의 삶에 감사하게 되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 동양인, 하물며 여성.
이곳에서는 내가 지닌 정체성이 몽땅 약점이 되었다. 나는 영어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 절대 주류가 될 수 없는 이민자에 불과했다.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다.
한편으론 완전히 벌거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형편없고 한심했다. 불합리함을 당당하게 따지지도, 지혜롭게 대처하지도 못했다. 무능력하고 유약한 민낯이 까발려지는 게 차별당하는 경험보다 더 수치스러웠다.
나는 특별해야 해. 이런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나는 오만한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닌 그저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의 나는 더 이상 없다.
이민자, 이방인, 주변인, 비주류.
이것이 지금의 나다. 현재의 내가 바로 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새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근원적으로 한심하고 무능력한 나의 단면 또한 인정하기로 했다.
가슴 위에 쌓여 있던 여러 개의 벽돌 중 하나가 치워진 것처럼, 아주 조금 숨이 트였고 동시에 허탈했다.
그때 나는, 살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생의 과업을 통과하고 있었다.
명제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그렇다.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어도 구하러 오는 사람은 없다. 대신 살아주지도, 책임져 주지도 않는다.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기대거나 의지할 데 하나 없이, 오직 나 홀로 서 있었다. 세상의 기준, 타인의 시선, 무의미한 조언과 영혼 없는 위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사방은 고요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해야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게 중요한 게 무엇인가?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와 같은.
그러니까 이때 느낀 고독은 일반적인 외로움과는 좀 달랐다. 혼자됨의 훨씬 날것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두려움과 자유의 경계에 있었고 취약함과 강인함이 교차하고 있었으며 무력감과 통제감이 공존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