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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Jun 07. 2022

언니에게 들어온 맞선

세 번째 이야기

캐나다의 할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한인성당의 교인에게 이제 막 사십에 들어선 노총각 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삼십 대 초반이었던, 역시나 노처녀였던 언니와 연배가 얼추 맞으니 맞선을 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당시 언니는 십 년 가까이 교제했지만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남자 친구와 막 이별을 한 참이었다. 이 제안이 솔깃할 만도 한데 언니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요즘 같아서는 남자든 결혼이든 다 귀찮아." 언니는 말했다. "게다가 캐나다에 사는 사람을 내가 몇 번이나 만날 수 있겠니?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이 캐나다에 살든지 한국에 살든지는 사실 상관없어. 나는 내 연애사에 어른들이 관여하는 것 자체가 싫어. 엄마, 아빠도 모자라서 할머니까지 간섭하고 잔소리할 것 아냐.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언니는 의사를 묻는 어른들에게 서로를 충분히 알아가기에는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고 시간도 부족할 것 같다며 거절의 의사를 비쳤다 . 하지만 할머니는 몇 가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달아 다시 의사를 타진해 왔다.

"캐나다에 오래 머물면서 만나보면 되지 않겠니? 네가 충분하다고 여길 만큼의 기간 동안 말이다. 그동안 여기 있는 어학원이라도 등록하렴. 겸사겸사 영어 공부도 하고 좋지 안 그래? 어학원 등록금은 내가 내주마." 이 미끼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영어공부와 해외생활, 거기에 비용이 들지 않는다라...... 언니의 반응은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빙긋이 웃으며 언니는 말했다.






언니는 그렇게 캐나다로 떠났다. 그리고 모든 가족의 초유의 관심 속에서 맞선을 보았다. 하지만 부모님과 할머니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둘은 연결되지 않았다. 언니 말에 따르면 그 남자는 단 한 시간도 함께 있기 힘들 정도로 따분한 성격이라고 했다. 만약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나마 언니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이야기의 전개는 다소 복잡해졌을 것이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언니에게 그 남자와 계속적인 만남을 강요했을 것이 뻔했다. 그랬다면 언니는 그에 맞서 상당히 피곤한 싸움을 벌여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상대가 구미에 맞지 않았던 것은 남자 쪽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이 맞선은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만큼은 정확히 일치한 채로 종결되고 말았다. 이렇듯 혼기 놓친 여식을 치워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날아가 버리자 부모님은 상심했고 맞선을 주선한 할머니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언니는 그다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골치 아픈 숙제를 해치워 버린 직후 놀 궁리를 하는 십 대처럼 활기가 넘쳤다. 맞선의 성공 유무와 상관없이 할머니의 약속대로 어학원을 다니며 당분간 캐나다에 머물게 됐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따박따박 받아먹고 가끔은 용돈도 타 쓰면서 말이다. 물론 고집스럽고 독단적이며 고리타분한 할머니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작은 애로사항에 대해 종종 불만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그녀 자신도 세상에 완전한 공짜는 없다는 이치 정도는 깨친 나이였으므로 그 부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니는 그 문제를 차치하고도 캐나다에서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흡족해 했고 어학원이 끝나갈 무렵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캐나다에 남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할머니 또한 손녀와 함께 지내는 것이 귀찮지 않았던 모양이었는지 언니의 캐나다 정착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며 결정적인 힘을 실어 주었다. 언니는 유학원과 이주공사를 찾아다니며 이민과 관련하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유학원의 조언에 따라 2년제 커뮤니티 컬리지의 유아교육과에 입학하기로 결정한다. 유학원의 설명에 따르면 학교를 졸업한 뒤 취득하게 되는 교사 자격증으로 현지 어린이집 교사로 취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캐나다에서 이 직업군은 항상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구직이 쉬운 편이고 직장으로부터 노동 비자를 지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지 직장에서 얼마 동안 경력을 쌓으면서 영어점수와 여타의 자격을 갖추면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언니는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한동안 미술학원과 개인교습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있었다. 어린이집 교사라면 한국에서의 경력과 아주 동떨어진 낯선 분야는 아니었다. 언니는 곧바로 유학원이 연결해준 커뮤니티 컬리지에 등록을 했다. 캐나다의 학비는 캐나다 국적인 사람들과 외국인 신분에게 차등을 두었기 때문에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하지만 비용은 할머니가 지불했기 때문에 학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모님은 앓던 이가 빠진 듯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당사자인 언니 또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는 기대에 부푼 채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몇 달이 지났을까? 캐나다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갑작스러웠는데 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연세였지만 평소 매우 건강한 편이었고 활동적이었으며 이전에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쓰러지기 바로 전날까지도 혼자 버스를 타고 한인마트에 가서 세일한다는 과일을 손수레에 세 박스나 실고 집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처럼 모든 일상이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으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가슴 통증을 호소했고 그러다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앰뷸런스를 타고 도착한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시행한 후에 의사는 할머니 심장 근처의 혈관에 구멍이 나 출혈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혈관은 이미 노쇠하여 조직이 약한 상태이기 때문에 수술이나 그 어떤 물리적인 치료를 하더라도 그 구멍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소식을 들은 아빠는 허둥지둥 급하게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로 날아갔다. 거의 의식이 없이 누워있던 할머니는 신기하게도 아빠가 침상에 닿자마자 아주 잠시 의식이 꽤 또렷하게 돌아왔다고 했다. 자기 주변에 모인 가족들의 얼굴을 다 알아보았고 무려 육성으로 유언까지 남겼다. 할머니는 그렇게 아빠와 언니, 고모네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몇 시간 뒤 숨을 거뒀다. 마치 자신의 아들이 한국에서 캐나다까지 오는데 걸리는 딱 그 시간만큼을 기다리기 위해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을 다 써버린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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