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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루 Jun 18. 2022

할머니

네 번째 이야기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캐나다로 이주했다. 무역업을 하던 고모부를 따라 일본에 거주하던 고모네 가족은 그곳을 떠나야 하는 시점이 되자 한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캐나다 이민을 택했다. 할머니는 고모와는 별개로 한국에 쭉 살았는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을 택했다. 고모가 권유한 것은 아니었고 순전히 할머니 자의로 내린 결정이었다.

할머니는 자식에게 의존하는 여타의 노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알코올 의존증인 할아버지와 이혼 후 동네에서 목욕탕을 운영하며 홀로 아빠와 고모 남매를 키웠다. 목욕탕 운영은 벌이가 짭짤했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당시 붐이 일던 부동산 투자를 시작했다.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그녀의 촉은 대부분 적중했고 사 들이는 지역마다 몇 년 안에 크게 개발이 되었다. 

"이재(財)에 밝은 노인네." 고부갈등으로 할머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엄마는 이렇듯 항상 비꼬곤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경제적 안목에 은근슬쩍 신뢰를 표하기도 했는데 할머니가 어느 지역에 부동산을 샀다는 소식을 들으면 "노인네가 생각 없이 거기를 산 건 아닐 거야. 그쪽으론 아주 도통했단 말이지."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아빠와 고모가 각자 결혼을 하고 떠나자 할머니는 반포동의 넓은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에 혼자 살았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할머니는 혼자 산 적이 없었다. 집에는 항상 객식구가 있었다. 바람난 남편에게 소박맞아 갈 곳 없던 할머니의 여동생이라든지 머리가 좋아 수재 소리를 들었지만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조카라든지(할머니 덕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던 이 사람은 훗날 지방검찰청의 검사장까지 되었다)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해 집도 절도 없어진 고종사촌 식구라든지 시기가 조금씩 달랐을 뿐 항상 얹혀 사는 누군가 있었다. 먼 친척들도 수시로 인사를 하러 들렀으며 가족 중 그 누구도 할머니에게 맞서거나 반발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막강한 경제력으로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서 왕처럼 군림했다.





캐나다로 이민할 당시 그녀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예측해 보건대 일흔에 접어든 나이였을 것이다. 보통 그 나이쯤 되는 노인이라면, 이국의 땅에서 살겠다는 결정을 선뜻 내릴 수 없을 것이다. 할머니가 병들어 거동이 불편하거나 가진 재산이 없어 자식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처지였다면 모를까, 그녀는 나이에 비해 건강했고 부자였으며 혈육들 사이에서 꽤나 독자적인 위치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왜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 생각을 했느냐고 할머니에게 묻고 싶지만 아쉽게도 할머니로부터 답을 들을 수는 없게 되었다.

나는 사실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 가끔 명절 때 찾아뵌 적은 있었지만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가 어그러진 이후 왕래는 더욱 뜸해졌다. 더군다나 그녀가 캐나다로 떠난 뒤로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희박해졌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와 애정이나 친밀감을 쌓을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할머니에게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간간이 소식이 들려오는, 별로 가깝지 않은 먼 친척같이 여겨졌을 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나는 크게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할머니가 유산으로 남긴 방 두 개 딸린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또 엉겁결에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떠맡게 되면서 나는 그녀가 남긴 삶의 흔적 그 한가운데로 의도치 못하게 떠밀려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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