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모습을 꿈꿨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의 에밀리처럼 어드벤처와 로맨스가 넘실대는 세련된 해외 생활을 즐기는 그럴듯한 인생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과장과 허구로 연출된 티브이쇼와 실제를 구분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드라마와 달리 정작 우리가 발 담고 있는 현실 세계는 분야를 막론하여 온갖 남루함과 비굴함이 뒤섞인 총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지의 세상에 단 한 발짝 딛기만 해도 인생이 백팔십도 바뀌리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그토록 여행에 매달리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여행지에서 마주하게 되는 풍경과 문화는 색다르고 이국적이며 그래서 매력적이다.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하게 된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삶이란 대체 어떤 기분일까? 더 이상 새로울 것 하나 없는,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고국을 벗어나 어딘가로 떠난다면 분명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겠지. 막연한 기대가 몽글몽글 솟아난다. 해외생활에 대한 환상을 나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하기로 결심했을 때 서른셋이었다. 그즈음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느낄법한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 결혼이 인생의 최우선순위이거나 꼭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불안했다. 생각해 보면 그 불안감은 단순히 결혼의 유무에서 파생된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정도의 시점이라면 정체성을 증명하고 대변할 무언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미혼인 채 나이 들어가고 있지만 당당하고 자주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남에게 내세울 만한 제반 사항 말이다. 이를테면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좋은 직장을 다니며 능력을 인정받거나, 혹은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과 취향을 드러내는(이 또한 겉으로 내세울 수 있을 만한 수준이고 밥벌이가 되는) 창조적인 예술가의 삶을 영위하거나,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속하지 못한다면 최소 결혼이라도 하고 애라도 낳아 키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참고로 결혼과 출산을 비하하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결혼과 출산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거의 수행에 가까운 고난도의 분야라고 생각한다. 결혼을 그저 일종의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여겼던 미성숙한 과거에 가졌던 생각이 이랬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직업적 커리어는 빈약하기 그지없었고 결혼은커녕 그걸 고민할 만한 진지한 연애 경험조차 전무했다. 미래를 위한 반듯한 목표나 체계적인 계획도 없었다. 하다못해 스스로 뭘 잘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못하는지 조차 몰랐다. 내 정체성이란 희미하고 불분명할 뿐이었다. 그 점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진취적으로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내달리고 있었다.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거침없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내 영혼은 어느 쪽의 속도도 따라잡지 못한 채 굳어버린 화석처럼 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두 발은 항상 공중에 붕 떠있는 것 같았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매번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존재해야 하는지, 그걸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어찌어찌 캐나다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낯선 나라로의 이주는 생각만 해도 대단히 두려운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모든 애로사항을 감수하고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미치광이 같은 한국의 무한경쟁사회에서 교묘히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러니까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고도 열외로 분류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같았고, 잘만 포장하면 평범한 삶을 특별하게 보이게끔 탈바꿈할 수 있을 듯싶었다.
무엇보다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 있는 미혼녀가 순전히 나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존심을 구겨야만 하는 상황과 주변인들의 측은한 시선과 어서 빨리 결혼이나 하라는 잔소리에서 완벽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처녀를 강퍅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피했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외국이든 한국이든, 장소가 어디든 시간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나이는 거침없이 들어갈 뿐이다. 노화라는 자연현상은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삶을 덮친다. 외모는 점점 아름다움과 멀어져 가고 신체적 기능은 현저히 떨어져 간다. 자율신경계와 면역체계는 아주 작은 변화나 스트레스에도 맥을 못 추고 휘청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이 듦은 실제적으로 가동되는 일상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주어서 당사자가 아무리 나이를 잊고 살려고 노력해도 전혀 그럴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진짜 외면하고 싶었던 실체는 결국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는 절대불변의 진리,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늙는다는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도망치려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도망갈 곳은 더 이상 없었다. 이제는 여전히 혼자인 채 초라하게 늙어가는 나를 받아들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