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만의 새해맞이 이벤트가 있습니까?

by 모모루

처음 돈을 주고 달력을 구입한 건 미술관에서였다. 미술관 자체의 상설 기념품 샵도 있지만 특정 전시가 끝나는 길목에는 그날의 전시와 관련된 굿즈만 모아 놓고 파는 구역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미술관 기념품이란 대개 전시 작품이 프린트된 엽서와 카드, 포스터가 주를 이룬다. 요즘에는 휴대폰 무선 충전기나 우산, 안경을 닦는 천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작품 도록에 가까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달력도 있다. 다만 달력은 연말과 연초에 국한된 시즌성 성격 때문에 항상 구매할 수 있는 품목은 아니다. 그마저도 전시 주최 쪽에서 아예 제작하지 않았다면 살 수 없다. 그러니까 마음에 드는 전시의 달력을 구입하기란 일정 부분 운이 따라야 한다. 달력 구입에 성공하면 일 년 동안 벽에 걸린 달력을 볼 때마다 뿌듯하다.





보통 미술관에서 판매하는 달력은 북미와 유럽 등지에서 수입된 것이 대부분으로 개중에는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자체 제작한 것을 들여온 경우도 있다. 가격은 재질과 만듦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반 달력보다는 비싼 편이다. 대신 그림의 인쇄상태가 좋고 양질의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여 낱장 하나하나가 포스터와 다름없는 퀄리티를 지녔다. 규격은 접혔을 때 가로 세로 12인치 정사각형으로, 펼쳤을 때 세로 길이가 24인치가 되는 벽걸이 방식이 많다. 미술 작품이 주목받을 수 있도록 날짜가 인쇄된 지면은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나는 고급 달력이 주는 느낌을 사랑했다. 세련된 미니멀한 구성과 매끄럽고 빳빳한 종이를 넘길 때의 감촉과 종이에서 나는 특유의 싸한 잉크 냄새가 좋았다.





달력이란 대체로 은행이나 기업에서 나눠주는 판촉물의 이미지가 강해서 돈을 주고 사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요즘은 시계 기능과 결합하여 종이를 넘겨야 하는 수고가 필요 없는 전자식 캘린더도 많다. 하지만 아날로그만이 가진 특유의 낭만은 불편조차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달력도 예외가 아니다.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작은 목표나 자신만의 분기점을 세운다면 이 행위는 꽤나 의미 있는 의식이 된다. 집 안과 사무실 어딘가 항상 비치되어 있기에 취미 감상용으로 활용하기도 좋다. 일례로 나 같은 소시민에게 고가의 미술 작품을 소장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달력에 실린 인쇄본으로나마 편하고 저렴하게 명화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회화뿐 아니라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 일러스트레이션을 주제로 한 달력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실은 달력이라도 걸어두고 수시로 감상해 보라.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러한 활동이 정신적 안정에 기여하는 바는 크다. 일반적으로 취미라 함은 심적 만족감을 제외하고는 금전적 수익이나 생활상의 편의 같은 이른바 '쓸모'를 기대하기 어려우나 달력만큼은 날짜를 확인하거나 스케줄을 짜기 위한 본연의 기능까지 갖추고 있으니 유용성에 있어서도 모자람이 없다.





10월 마지막 주 핼러윈이 끝나면 캐나다의 대형 쇼핑몰에 일제히 달력 가게가 문을 연다. 시즌성 상품이기 때문에 11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북미의 달력 시장은 이처럼 달력만 파는 가게가 따로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나 같은 달력 처돌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북미의 달력은 트렌드라 할 게 없이 클래식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편이다. 12x12 규격의 벽걸이 형이 가장 흔한데 내가 가장 선호하는 모양이기도 하다. 가격은 저렴하지 않아서 최소 15불 이상이고 비싸게는 50불에 육박하기도 한다. 달력 가게가 문을 열면 한동안은 달력 구경이 일상의 활력소가 된다. 풍경, 도시, 꽃, 영화, 동물을 비롯한 온갖 주제의 달력이 있지만 내가 관심 있는 분야는 회화 쪽이다. 명화 달력을 주력으로 제작하는 회사는 네댓 군데 정도로 정해져 있다. 작년과 똑같은 그림의 달력을 숫자만 바꿔 인쇄하는 꼼수를 부리는 곳도 있고 같은 화가라도 작년과는 다른 작품을 싣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곳도 있다. 참신한(?) 화가를 발굴하여 달력을 제작하는 열정적인 곳도 있다. 명화 달력계의 화석 같은, 그러니까 스테디셀러 격인 몇몇 대가의 경우에는 여러 회사에서 동시에 달력을 내놓는다. 회사가 인기 있는 화가의 달력을 각각 다른 그림들로 구성하여 여러 버전으로 내놓기도 한다. 디자인만 본사에서 하고 만들기는 중국에 수주한 경우도 있다. 달력 하나만 두고 봤을 땐 잘 알아차리기 힘드나 디자인과 제조를 모두 본사에서 시행한 제품을 갖다 놓고 비교하면 차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중국에서 제조한 달력은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종이가 얇고 인쇄 상태가 선명하지 않다.

나는 마음에 드는 달력을 발견하더라도 바로 구입하지 않고 새해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 1월 1일이 됨과 동시에 달력 가게가 세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새해를 앞두고는 정가로 팔다가 새해가 시작되면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가게가 문을 닫는 1월 말에는 할인가가 80%에 이르면서 거의 떨이 수준으로 파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웬만한 달력은 거의 다 팔리고 없기 때문에 점찍어 둔 달력을 안전하게 구입하려면 보통 새해 첫 주 절반 가격일 때 다. 집에 돌아와 벽에 새 달력을 걸면 비로소 진짜 새해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혼자만의 새해맞이 행사는 점차 확대되어 활동 하나가 추가되었다. 달력 선물하기이다. 물론 아무에게나 선물하지는 않는다. 달력에 대한 열망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거니와 무슨 달력을 비싼 돈 주고 사느냐는 핀잔을 듣거나 은행에서 무료로 주는 달력을 받을 때와 비슷한 뜨뜻미지근한 반응과 맞닥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주 오래된 친구 몇 명에게 국한하여 선물한다. 달력을 처음 선물할 때만 해도 순전히 이기적인 발상에서 출발했었다. 예쁜 달력은 넘쳐나는데 실생활에 필요한 달력은 딱 하나뿐이니 다른 사람에게 달력을 선물하는 것으로 구매욕을 충족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상대의 취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내 눈에 예쁜 달력을 골라 보냈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어 할지 어떨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바다 건너 날아온 달력을 받았을 때 무척 기뻐했다. 미술에 별 관심 없는 친구조차 진심으로 좋아했다. 달력을 방에 걸고 사진을 찍은 일종의 인증숏을 보내왔고 달력을 고르는 안목에 대해 칭찬했으며 다음 연말에는 어떤 달력을 받게 될지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며칠 전 단체문자 창에 친구 하나가 사진 몇 개를 올렸다. 가게를 구경하다 발견한 크리스마스 소품 몇 개가 정확히 내 스타일이라면서 찍어 보낸 것이다.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라는 문자도 덧붙인다.

다른 친구는 내가 몇 년 전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사다 준 크리스마스 랜턴을 켠 사진을 보내왔다. 랜턴을 찍은 사진의 경우는 선물을 한 이후 매 연말마다 받고 있었다. 친구는 자신이 랜턴을 한해도 빼먹지 않고 얼마나 잘 쓰고 있는지를 그런 방식으로 알려왔다. 선물한 물건을 상대방이 잘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좋아하는 내 습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좀 뭉클하다. 어떤 물건을 보면서 나를 떠올리는 친구의 다정함이 애틋했고 매번 사진을 찍어 보내는 세심한 표현력의 경우에는 무뚝뚝하고 표현하기를 쑥스러워하는 스스로를 반성하게 했다. 문득 깨닫는다. 이들은 내가 보낸 달력을 좋아하기 이전에 나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내 취미에 관심을 가져주고 취향을 존중해 주는 것이었다. 어떤 허튼짓을 해도 별스럽게 보는 게 아니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몰랐다기보다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달력가게를 들락날락하며 친구들에게 보낼 달력을 고른다고 요란을 떨었다. 내 취향이 아닌 각각의 친구가 좋아할 만한 그림은 어떤 것일까를 따져 고를 작정이다. 각자의 성향과 좋아하는 분위기를 고려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취향과 상관없이 달력 고르기는 그 자체로 여전히 재미있다. 그런 와중에 친구들을 더 자주 떠올렸다. 이제라도 덜 이기적이고 철없이 굴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전 02화캐나다 자취녀의 소소한 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