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불장군의 삶을 사는 나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개만큼은 항상 곁에 있었다.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있다는 표현은 하나도 과장되지 않아서 단순히 한 공간에 머무르기를 넘어 엉덩이를 내 신체 어딘가 딱 붙이고 있는 게 디폴트 값이었다.
개가 혼자 빈집을 지키는 상황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지만 집에는 일주일의 대부분을 재택근무하는 형부나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언니가 상주하고 있었다. 집안에서의 개의 행동패턴이란 내가 있으나 없으나 비슷하여 딱히 궁금할 게 없다. 몇몇 정해진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으로 이를테면 식탁 아래 카페트 위나 불 꺼진 화장실 안 깔개 위에 드러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여건이 된다면 언니나 형부 중 집에 있는 누구에게든 엉덩이를 갖다 붙이고 있었다.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는 딱 하나였다. 개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외출할 때다. 집순이인 나와 다르게 언니네 부부는 가끔 캠핑을 하거나 호숫가 공원에서의 피크닉을 갔다. 그럴 때마다 캠핑에서 개는 빠질 수 없는 피사체라는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마치 텐트나 캠핑의자를 챙기듯 개를 꼭 데리고 갔다. 다소 황당한 구실로 이용될지라도 개는 늘 기쁘게 따라나섰다. 밖에 나갈 수만 있다면 개의 입장에서는 이유가 뭣이됐든 전혀 상관없었다. 나 또한 그날만큼은 시간 맞춰 산책을 나가거나 간식을 달라는 끈질긴 무언의 요구에 압박감을 받을 필요가 없었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문제는 홀가분한 마음이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꾸만 발치를 살피고 현관문을 주시하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증상은 점점 심해져 개가 언제 돌아올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언니에게 언제 돌아오냐는 독촉성 전화를 걸고 만다. 분리불안을 가진 건 개가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개가 그립기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개의 시간이 궁금했다.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있을 때 개는 어떻게 행동할까? 어떤 표정일까? 가끔 뒤를 돌아 나를 찾지는 않을까?
센터에는 긴장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어김없이 새 학기가 시작되는 9월이면 처음 몇 주는 혼돈 그 자체였다. 입학생을 맞이하며 몰아닥치는 카오스적 상황은 매년 반복되고 있었지만 어떤 해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새로 들어온 아이와 학부모의 성향에 따라 향후 일 년 간 교사 업무의 강도가 좌지우지되었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에 눈을 과도하게 깜빡이는 버릇이 있는 여자는 딸이 이곳에 적응을 못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입학할 날짜는 2주도 훨씬 넘게 남았지만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오전이나 오후에 한두 시간씩 센터에 들렀다 가곤 했다. 신입생의 적응을 돕기 위해 3일간 부모와 함께 센터를 방문하는 일명 '그래듀얼 엔트리(Gradual entry)'가 있을 예정이지만 아이엄마는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이었다. 센터는 그녀의 추가적인 방문 요구를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페이지란 이름의 올해 네 살 된 여자아이는 연신 엄마 뒤로 숨었다. 익스트림리 샤이(extremely shy)하다는 엄마의 설명대로 아이는 수줍음이 많아 보였다. 나를 포함한 세명의 담임교사는 한껏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열심히 아이의 표정과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새 학기 첫날 울음을 터뜨리거나 엄마를 찾는 아이는 으레 있기 마련이지만 엄마가 아이의 내성적인 성격을 이 정도로 어필하는 경우는 확실히 드문 케이스였다. 교사들은 마치 관심병사를 맞이하는 상관과도 같은 심정이었다.
대망의 입학날, 발길을 차마 떼지 못하던 아이의 엄마가 센터 문을 닫고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교사들도 아이의 대성통곡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몇 분이 흘렀지만 아이는 조용했다. 몸을 배배 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교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커다란 인형의 집 앞에 데려가 앉히고 인형과 옷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옆에 놓았다. 입학 서류에 적힌 정보에 따르면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은 바비인형, 좋아하는 놀이는 인형 옷 갈아입히기였다. 바구니 안 가득 들어 있는 인형을 보자 아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인형 하나를 집어 들더니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페이지는 우려와 달리 센터에서 꽤 좋은 시간을 보냈다. 또래와 스스럼없이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의 놀이를 옆에 서서 흥미로운 눈초리로 구경했다. 교사의 지시에 따라 줄 서기와 장난감 정리도 곧잘 했고 점심 도시락도 남김없이 먹었다. 바깥 놀이 시간에는 놀이터에서 모래를 가지고 한참을 놀았다. 아이 상태를 체크하느라 한 시간마다 교실을 들락대던 원장과 부원장도 오후부터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아이는 분명 수줍음이 많았지만 엄마의 걱정만큼은 아니었다. 어쩌면 2주에 걸친 센터 방문이 도움이 된 건지도 몰랐다. 당시만 해도 교사들 모두 과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아이 엄마가 밀어붙인 방법이 사실은 옳았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아이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다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사람은 딱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아이 엄마였다. 하교시간이 되자 여자는 비명에 가깝게 "이즈 쉬 오케이?(Is she okay?)"를 외치며 센터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이는 엄마가 온 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여자의 표정은 사뭇 복잡 미묘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동료교사 한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맘 이즈 낫 오케이(Mom is not okay)."
동료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분리 불안 증세가 있는 쪽은 아이가 아니라 엄마였다. 순간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이 엄마를 비웃는 것이 아니었고 개가 없을 때 초조해하는 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가 모르는 아이의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비록 미혼이나 자식 비스무리하게 여기는 개가 있으니 그에 투영해 본다. 개와 반나절만 떨어져 있어도 몰려오는 상실감과 외로움을 떠올리면 엄마의 심정을 이해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키우는 개도 이런 지경인데 배 아파 낳은 자식이면 오죽할까? 어린이 집은 아이와 엄마가 태초로 분리되는 경험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엄마와 떨어져 본 적 없는 아이의 불안만큼이나 아이를 품에서 떨어뜨려 본 적 없는 엄마의 불안도 인정과 이해가 필요하다.
타닥타닥
발톱이 마룻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열린 문 사이로 흥분한 늙은 개가 뛰어 들어온다. 새로 산 텐트를 시험 삼아 쳐 보겠다며 공원에 간 언니와 형부를 따라나섰다 막 돌아온 참이다. 벌린 입 사이로 혀를 늘어뜨린 채 헥헥 소리를 낸다.
풀내음이 물씬 난다. 음... 풀밭에서 신나게 뒹굴었구나. 등허리의 털이 젖어있다. 음... 친구도 만났구나. 침 묻은 범위가 넓은 걸 보니 분명 덩치 큰 친구였구나.
인사를 마친 후 개는 물그릇이 놓인 곳으로 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물을 다 마신 후에는 발치 어딘가 자리를 잡고 드러눕는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에 빠져든다. 개는 오늘도 좋은 시간을 보낸 게 확실하다.
언젠가부터 내가 모르는 개의 시간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 여러 단서를 기반으로 개가 '나 없이도' 충분히 잘 지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쪽에서 겪는 분리불안까지 완벽히 사라진 건 아니다. 걱정과 별개로 허전하고 보고 싶고 궁금한 심정은 여전하다. 불안을 달래는 건 순전히 내 몫이니 개만 괜찮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이들의 부모도 그러기를 바란다. 환하게 웃는 얼굴과 모래투성이 신발과 집에 그만 가자는 채근에도 미적거리는 발걸음을 통해 아이의 하루가 어땠을지 추측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엄마아빠 없이도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기를 바란다. 헝클어진 머리를 쫑쫑 땋아놓고, 모래와 물감으로 더럽혀진 옷가지를 벗기고 깨끗한 셔츠로 갈아입힌다. 엉망으로 색칠한 종이와 도무지 형체를 알 수 없는 만들기 작품도 잘 챙겨 사물함에 넣어둔다. 내가 모르는 아이의 시간에 대해 추론할 만한 단서를 여기저기 남겨보는 것이다. 이 방법은 백번의 설명보다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