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오기 전까지는 김치를 담가 본 적이 없다. 먹는 일에는 늘 진심이어서 한국에서 자취할 때도 요리를 곧잘 했다. 다만 간편한 한 그릇 음식에 특화되어 있을 뿐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하는 요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클릭 한 번이면 전라도 장인의 김치부터 유명 호텔의 김치까지 언제든 주문해 집으로 배달시킬 수 있는 데다 김장철이 되면 주변 지인이나 친척이 맛을 보라며 집에서 직접 담근 김치를 나눠주는 일도 빈번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와서도 한동안은 한인마트에서 김치를 사다 먹었다. 한국만큼이나 선택의 폭이 넓진 않지만 대기업에서 제조한 김치도 수입해 팔고 있었고 캐나다 현지 업체에서 만든 김치도 있었다. 한국에서 들여오는 김치는 발효 식품의 특성상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시어 터져 있기 일쑤였고 값도 비쌌다. 현지 업체의 김치는 질 낮은 재료를 쓰는지 김치가 익을수록 양념이 끈적해지고 배추가 물러져서 더 이상 사 먹지 않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손수 김치를 만들어 먹기에 이르렀다. 해외에서 제대로 된 김치 맛을 구현하려면 귀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재배되는 채소의 종자가 다를뿐더러 한국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곳에서는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방법을 찾아낸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소리는 딱 이럴 때 하는 말이다.
물론 김장철에 맞춰 온 가족이 동원되는 제대로 된 김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감당할 만한 도구나 인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김치 냉장고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일 년 치 먹을 김치를 한 번에 저장해 놓을 수도 없었다. 식구라 해봤자 나와 언니 부부가 다였다. 매끼 한식을 차려 먹지도 않았고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김치 자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살림의 규모나 소비하는 사람의 수를 고려해 봤을 때 딱 배추 한 포기 분량의 김치면 충분했다. 한 포기김치는 만드는데도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고 김장철을 기다릴 것 없이 수시로 담가먹을 수 있다.
김치의 주재료가 되는 배추를 이곳에서는 나파 캐비지(Napa cabbage)라 부른다. 나파 캐비지는 서양요리에 흔히 쓰는 식재료는 아니어서 로컬 마트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채소는 아니다. 아시안 인종이 많이 사는 지역의 로컬마트라면 더러 파는 경우도 있지만 이 또한 복불복이다. 헛걸음할 걱정 없이 배추를 사려면 주로 한국마트나 중국마트를 가야 한다.
11월이 되면 캐나다의 한인마트에도 배추가 박스째 쌓이며 김장철의 포문을 연다. 평상시에는 주로 시애틀에서 재배된 미국산 배추나 캐나다 로컬 배추를 팔지만 이 시기만큼은 한국산 배추를 잔뜩 수입해 들여온다. 확실히 세상은 좋아져서 캐나다에서도 수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해남 배추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김치용으로는 확실히 한국산 배추가 좋다. 잎사귀가 힘이 있고 단단한 데다 물기가 적어 오래 저장하기에 적합하다. 맛도 훨씬 고소하다. 미국 혹은 중국에서 수입해 오거나 캐나다 현지에서 재배된 배추는 물기가 많고 조직이 연하다. 쉽게 무르고 맛이 싱거웠다. 겉절이나 조금씩 담아 빨리 소진하는 김치용으로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두고두고 먹을 김장 김치용으로 걸맞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원산지와 상관없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배추로 김치를 해 먹다가도 마트 한쪽 쌓여있는 한국 배추를 볼 때면 비록 제대로 된 김장은 아니더라도 맛있는 한국 배추로 김치를 만들고 싶은 열망이 새록새록 돋는다. 문제는 한인마트의 한국산 배추는 언제나 박스단위로만 파는 데 있었다.
다. 보통 한 박스에 배추 예닐곱 개가 들어있었는데 배추 한 포기가 최대 용량인 나에게는 너무 많은 양이다. 물론 배추를 낱개로 살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배추 한 박스의 가격을 낱개로 환산해 비교했을 때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쌌다. 배추 한 박스가 이십오 불 안팎인데 배추 한 포기만 살 때는 무게에 따라 십 불 혹은 그 이상을 줘야 한다. 아무리 낱개로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돈을 주고 사고 싶지는 않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 하는 게 아니었다. 지역의 인터넷 한인 커뮤니티에는 매번 배추를 박스로 사서 나누자는 글이 올라왔다. 낱개로 사는 대신 박스로 배추를 사서 둘이나 셋이 나누는 꽤나 좋은 아이디어였다. 실제로 배추 박스 나누기의 호응도는 매우 높았다. 다들 어찌나 잽싸게 댓글을 다는지 글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거래 완료가 된 경우가 허다했다. 막상 그럴 기회가 있더라도 고작 배추 몇 포기를 싸게 사려고 모르는 사람과 연락을 하여 시간과 장소를 조율하기란 극도로 내향형인 나 같은 인간에게는 선뜻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결국 한국산 배추 구입을 포기하고 동네 중국마트에서 배추를 사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마트에서는 낱개로 배추를 팔았고 가격도 합리적인 편이었다. 다만 이곳에서 배추를 살 때는 원산지를 꼭 확인했다. 중국마트다 보니 당연히 중국에서 배추를 가져다 파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봤을 때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어쩐지 재배 과정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미국이나 캐나다 배추를 구입한다.
김치의 또 다른 주재료인 무는 배추보다는 훨씬 쉽게 아무 마트에서나 찾을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아는 한국 무가 아닌 옛날엔 다꽝이라고도 불렀던 다이콘을 판다. 다이콘 무는 알다시피 일본에서 단무지를 만들 때 쓰는 얇고 길쭉한 모양의 무다. 조선 무와 달리 알싸한 매운맛이 없으며 조직이 연하여 아작아작한 식감이 덜했다. 하지만 다이콘 무 나름의 장점도 있었는데 앞서 설명한 대로 단단하지 않기 때문에 칼로 썰때 쉽게 썰려서 팔목이 아프지 않다.
김치 담그기가 밑반찬 만들기만큼이나 간단해지려면 몇 가지 팁이 있다. 첫째로 무채를 과감히 생략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공정을 단순하게 만들기에 앞서 순전히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김치를 먹을 때 건더기가 많이 딸려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자취인의 필수요리인 김치볶음밥이나 김치찌개를 끓이는 데 있어 김치 속 무채는 다 털어내야 하는 방해꾼에 불과하다. 무채를 넣지 않고도 김치 맛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무를 갈아서 양념에 섞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양념에 수분을 더할뿐더러 김치의 시원한 맛을 증폭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보통 김치 양념에 추가하는 과일로 배를 들 수 있다. 이곳에서 배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서양배는 우리가 먹는 배와는 달리 스펀지처럼 퍼석하고 물기가 거의 없다. 한국산 배는 언제나 그렇듯 비싸서 김치양념으로 쓰기 위해 사기에는 영 아깝다. 이때는 사과를 쓰면 된다. 북미의 사과는 값이 매우 저렴할 뿐 아니라 종자가 다양하고 맛도 좋다. 사과를 갈아 사용하는 것보다 더 편리한 대체품도 있다. 애플소스다. 애플소스는 사과를 끓여 갈아낸 걸쭉한 액체로 캐나다 아이들 학교 도시락에 간식으로 자주 싸 오는 북미 지역의 대중적인 식품이다. 큰 통에 담긴 것도 있지만 딱 한번 먹을 분량만큼 플라스틱 컵에 담아 팔기도 한다. 설탕이나 다른 과일을 섞은 제품도 있지만 백 퍼센트 사과만을 사용한 제품도 있다. 김치 양념에 사과를 갈아 넣는 대신 이 애플 소스를 넣으면 편리하다. 멸균처리되어 유통기한 걱정 없이 실온에 보관이 가능하기 때문에 상비해 두면 김치에 넣을 사과가 떨어져도 귀찮게 사러 나갈 필요가 없다. 사과를 씻고 자르는 수고도 덜 수 있다. 물론 신선한 사과를 갈아 쓰는 게 영양면에서야 좋겠지만 사실 김치 맛을 보면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맛의 차이가 없다면 쉽고 간편한 방법을 택하는 게 자취 살림에 걸맞은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추만큼이나 김치에 있어 중요한 재료는 소금이다. 소금을 잘못 쓰면 김치에서 쓴맛이 나고 몽땅 버려야 한다는 소리를 주워들은 바가 있었기에 처음에 소금만큼은 현지에서 파는 걸로 대체하지 않고 한국산 천일염을 사다 썼다. 일단 한국에서 건너오면 무조건 가격이 비싸지는 건 소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양도 피클 같은 절임음식을 만들어 먹기 때문에 김장용 천일염처럼 굵은 입자의 바다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다만 씨 솔트(Sea salt)라고 붙여놓고 파는 것이라도 성분표를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금이 뭉치거나 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화학 첨가물을 넣은 제품이 있기 때문이다. 월마트 자체 브랜드인 그레이트 밸류(Great value)의 피클용 소금은 일 킬로에 단돈 99센트였다. 한국산 천일염과 비슷한 굵은 입자인 데다 스페인의 지중해에서 난 소금이고 어떤 첨가물도 들어있지 않다. 시험 삼아 이 소금을 사다 김치를 만들어 보았는데 배추도 잘 절여지고 맛도 좋았다. 이후에는 한국소금 대신 월마트 소금을 사용한다.
젓갈은 한국마트에서 구입한 새우젓과 태국 피시소스를 섞어 쓴다. 새우젓이 없다면 피시소스만 써도 무방하다. 한국산 액젓도 좋지만 만약 구하기 어렵다면 로컬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태국이나 베트남의 피시소스를 써도 비슷한 맛을 구현해 낼 수 있다. 피시소스는 한국의 멸치액젓에 비해 맛이 훨씬 가볍고 단맛이 강하다. 전라도 김치처럼 진득하고 쿰쿰한 맛을 내고 싶다면 한국 액젓을 넣는 게 맞겠지만 짜지 않고 깔끔한 맛을 선호한다면 피시소스가 오히려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자취인이 만드는 김치는 포기로 담그기보단 전부 썰어 막김치로 담그는 편이 수월하다. 배추를 한입 크기로 잘라 소금에 절인다. 양념은 앞서 설명한 대로 무, 양파, 사과(혹은 애플소스), 마늘, 생강, 식은 밥 한술, 새우젓, 피시소스를 믹서기에 한 번에 넣고 갈아버리면 끝이다. 육수를 넣는 것도 좋지만 귀찮으니 생략한다. 젖은 재료와 무가 갈릴 때 나오는 수분으로 충분하다. 만약 너무 뻑뻑하다 싶으면 물을 조금 넣어도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긴 하나 나는 워낙 김치양념에 건더기가 있는 것을 싫어하므로 최대한 곱게 갈아준다. 특히나 밥을 넣었을 때는 밥알의 형체가 보이지 않을 만큼 완전히 갈아주는 것이 좋다. 사실 밥풀은 김치가 숙성이 되는 과정에서 녹아 사라지지만 이 김치는 장기간의 숙성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다 먹을 때까지 밥알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 붉은 양념 사이로 허연 밥풀이 보이는 게 거슬리지 않다면 상관없지만 나로서는 재탕한 식당 반찬그릇에서 먹다만 밥풀을 발견할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어서 처음부터 확실히 갈아버린다. 이 혼합물에 고춧가루를 적당히 넣고 섞어준다. 간을 봐서 싱겁다면 소금이나 피시소스를 첨가하여 간을 맞춘다. 김치 양념이 완성되면 씻어서 물기 뺀 절인 배추와 한데 섞는다. 잘 버무린 김치는 적당한 통에 넣은 뒤 실온에 이틀 정도 뒀다 냉장고에 넣는다. 이 방법으로 김치를 몇 번 만들다 보면 나중에는 계량이고 뭐고 할 필요 없이 눈대중으로 대충 재료를 때려 넣어도 맛을 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며칠 전 언니가 뜬금없이 김치 한 사발을 얻어왔다. 종종 머리를 하러 가는 한인 미용실의 아줌마가 김장을 했다며 김치를 나눠 줬다는 것이다. 캐나다에 와서 김장철이라고 남에게 김치를 얻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푸른 겉잎으로 야무지게 싸인 김장 김치가 들어있다. 알싸한 마늘과 곰삭은 젓갈 냄새가 훅 들어온다. 실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익숙한 한국의 냄새였다. 잎사귀를 하나 떼어 맛을 보았다. 그동안 내가 만들어온 자취용 막김치와는 차원이 다른 깊고 풍부한 감칠맛이 느껴졌다. 배추도 분명 한국산 배추를 쓴 게 확실했다. 아작아작 씹히는 데다 고소한 것이 흐물흐물한 미국산 배추와는 확실히 다르다. 오랜만에 맛본 갓 담근 김장김치는 맛이 좋을 뿐 아니라 마치 어린 시절 먹던 추억의 음식을 성인이 된 후 접했을 때만큼이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고작 머리하러 온 손님에게조차 김치를 나눠주는 한국 특유의 정은 또 어떤가? 그 마음이 몹시도 고마웠다. 해외에 살면 이런 '한국적'인 것들이 아주 특별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