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우 01
오랜만에 찾아온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비가 오고 내내 흐리던 날은 잠시 지나갔는지, 맑은 하늘과 포근한 봄바람만이 불어오고 있었다. 프랑스길의 2/3 정도쯤 걸었을 때, ‘스페인 하숙’이라는 예능에서 나왔던 마을에 도착한 날이었다. 이날 머물게 된 숙소는 그동안 지내오던 곳들과는 약간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던 숙소였다. 그동안 머물렀던 숙소들과 도미토리라는 공용 숙소인 점은 같았다. 일반적으로 도미토리형 숙소의 경우에는 방안에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10개 정도의 2층침대가 있는 게 일반적인 도미토리의 구조였지만, 이곳은 방이라는 구조라기보다는 넓은 거실에 2층 침대가 아닌, 개인 침대가 10개 정도 놓여 있었다. 가려지는 부분이 없어 프라이빗한 구조는 아니었지만, 그곳에 같이 묵는 사람들이 그동안 함께 걸었던 사람들도 꽤나 많아서인지 불편한 점은 없어 보였다.
내 옆자리에는 2주 정도 함께 걸었던 폴란드 아저씨인 '미하우'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튼튼하고 건강해 보이는 몸매와 함께 잘 정돈된 짧은 스포츠스타일의 금발머리는 그의 건강한 이미지를 더 그렇게 보이게 했고, 얼굴의 주름들은 미하우의 나이를 대신 보여주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는 이네스와 알레한드로 그리고 한국인 대학생이었던 하연씨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도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각자의 정비 시간을 조금 갖고, 마을을 구경할 겸 혹은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숙소에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흩어졌다. 난 이네스와 알레한드로, 미하우와 함께 동네 구경을 할 겸 길을 걷다 마침 열려있던 오래된 펍 야외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를 시켜놓고 어떤 안주를 먹어볼까 고민하며 메뉴판을 보고 있던 찰나에 감바스라는 메뉴를 찾을 수 있었다. 새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나는 이네스에게 손가락으로 감바스를 가리키며, '당장 이거 시켜야 해!'라는 눈빛을 보냈다. 역시나 눈치가 빠른 이네스는 알겠다는 눈짓과 함께 카운터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감바스를 주문해 주었다. 15-20분쯤 지났을까,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큰 접시 한가득 노릇노릇한 새우가 나왔다. 한국에서 먹어봤던 감바스의 비주얼보다는 노량진에서 자주 먹던 대하소금구이? 에 가까운 음식의 비주얼에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결국 새우였기에 감바스를 먹는다는 설렘은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먹기도 전에 난 속으로 이건 맛없을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새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껍질을 까지 않고, 머리만 똑 떼어내어, 그대로 입 속에 넣었다. 꼬리 부분을 뱉어내고 입안에 남아있는 새우를 몇 번 씹어보니 '오!' 이거다 싶었다. 정말이지 맥주를 부르는 맛이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껍질채 먹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야! 그렇게 먹는 거 아니야! 껍질 까서 먹어야 돼!”
라며 한 마디씩 했지만, 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에이 아니야. 난 한국에서도 이렇게 먹어. 얼마나 맛있는데, 더 고소해!”
정말이지 너무 맛있는 감바스? 였다.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 감바스를 다시 먹어보니, 이날 먹었던 감바스는 감바스와는 다른 요리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 여러 유투버들을 통해 스페인 음식이 전반적으로 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한 두 번을 제외하고 나면 내 입맛에는 잘 맞는 편이었다. 정신 못 차리고 새우 서너 마리를 허겁지겁 먹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미하우 역시 날 따라 껍질채 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하우의 나라인 폴란드는 바다가 없는 나라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함께 해산물을 먹을 때면 유독 맛있게 먹었다. 어느새 새우 대가리만이 테이블에 수북이 쌓여있는 걸 알았을 때, 미하우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멈칫하다 어느 정도 서로가 원하는 것을 알아챈 후, 이네스를 쳐다봤다. 그래도 한 달가량을 함께 지내다 보니 이네스는 나와 미하우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아챘다. 셋이 말 한마디 없이 간단한 손짓과 눈빛만 교환하고 나서 이네스가 카운터로 가 맥주 두 잔과 함께 감바스를 하나 더 주문하자, 같이 있던 다른 친구 둘은 또 한 번 놀라는 표정이었다.
나와 이네스, 미하우는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잘 통하지 않는 정도보다 훨씬 더 통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어와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고, 이네스와 미하우는 각자의 모국어인 스페인어와 폴란드어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잘 맞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함께 하는 게 편했고, 실제로도 그동안 함께 했었던 다른 친구들은 우리 셋을 보고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같이 잘 다니는지 항상 의아해했었다. 언제부턴가 이네스는 우리에게 ‘수퍼 콤비네이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말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네스와 미하우, 나의 관계에서 서로를 연결시키는 연결 고리는 뭘까란 생각을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셋의 공통점은 언어에 있어서 제약이 있다. 그래서인지 서로가 하는 말에 있어 더 귀 기울여 들으려 하고, 눈짓과 몸짓을 보며 그 의미를 더 잘 파악하려 한다. 또 뭔가 길을 걸을 때, 각자가 생각한 계획대로 맞춰하려 한다는 점도 있다. 먹는 것에 있어서도 셋다 음식을 가리는 게 없이 다 잘 먹는다는 것과 술을 즐긴다는 것 또한 중요한 요소이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함께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와 미하우는 식당에서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이네스에게 항상 물어봤고, 이네스는 그런 우리에게 그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거나, 그날의 날씨와 가장 잘 어울리는 스페인 음식을 골라주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