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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Jan 21. 2024

프롤로그_일본에서 10번의 12달을 보내다.

일본에서 10년 살게 된 이유

'일러라~일러라~일본▲~♫ 일본에 가서 ■●★~♫'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자주 입에 올렸던 우리들만의 유행가. 그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고자질할만한 낌새가 있는 아이에게는 연신 이 멜로디를 읊조리며 놀리고는 했다.


언어유희라고 치더라도 하필이면 왜 이런 노랫말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아직 우리나라 역사는커녕 대한민국 근현대사,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뉴스의 의미조차 헤아리지 못하던 그때. 아마 은연중에 '일본 = 나쁜 나라'라는 프레임에 갇혀 버리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나 또한 일본을 싫어했다. 거기에 침략이라는 역사와 독도 분쟁 같은 팩트가 더해지면서 일본은 싫음을 넘어 적대적인 나라로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히게 되었다. 비록 드래곤볼, 슬램덩크와 같은 일본 만화에 심취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비평준화 지역에서 운이 좋게 인문계 학교로 진학하기는 했지만 공부에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무언가 취미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책장에 꽂혀 있던 '일본어 회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좋아하던 어머니가 보던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그중 오래된 일본어 회화책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셨다고 한다. 젊을 때 공부하려고 사놓았다가 결혼하고 육아하느라 제대로 보지는 못하셨다고 했다. (그래도 책은 버리지 않으셨다.)


책을 펼쳐보니 왠지 모르게 글자들의 생김새가 흥미로워 보였다. 꼬부랑 알파벳은 어순도 다르고 도무지 재미가 없었는데 일본어는 왠지 동글동글 하니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 귀여운 글자는 히라가나(ひらがな)였다. 그래서 알파벳을 외울 때처럼 무작정 히라가나 깜지를 써가면서 외우고 또 외웠다. 그 옆에 있던 딱딱한 글자인 가타카나(カタカナ)도 마찬가지로 깜지공법으로 외웠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닌 자발적으로 하는 인생 첫(!) 공부였기에 왠지 모르게 재미있고 흥미가 생겼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일본어(정확히는 일본)와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일주일에 2시간만 있던 일본어 수업시간이었다. 평소처럼 수업을 마무리하는 가 싶더니 선생님께서 갑작스러운 공지를 하나 발표했다.


"이번 여름방학 때 일본으로 3박 4일 홈스테이 갈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어. 모집인원은 00명. 시(市) 내 중학교에서 전부 가니까 빨리 신청하는 게 좋을 거야."


비록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그 언어에 흥미를 가졌을 뿐 일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없었다. 국사 시간에 배운 일본의 파렴치한 침탈 행위에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하던 들끓는 십 대였다. 그렇게 공지를 별생각 없이 흘려보냈다.


그런데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운명의 자석 같은 게 있나 보다. 때마침 그 이후 청소 당번을 맡은 곳이 일본어 선생님이 계신 학생과 사무실이었다. 청소시간에 그곳을 청소하며 자연스럽게 일본어 선생님 자리도 한 번씩 쑤욱 쓸고 닦는다. 그분 자리에는 일본에서 찍었던 사진과 일본어 책들이 놓여 있었다.


어느덧 홈스테이 모집 기간은 끝이 났고 나는 여전히 학생과 사무실을 청소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본 홈스테이'라는 말이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갑자기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선생님! 저도 홈스테이 보내주세요."

"미안하지만 이미 모집이 마감되었어. 인원도 다 찼고"


때마침 학생과에 계셨던 일본어 선생님께 대뜸 홈스테이를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역시 기간이 지난 터라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평소(아니 지금)의 나라면 포기했을 텐데 왜인지 모르게 어떻게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홈스테이 보내주세요. 꼭 가고 싶어요."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어필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기회를 놓친 건 분명 내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매번 생떼를 쓰니 아마 선생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도, 짜증 났을지도 모른다.


"음..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가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볼게. 대신 기말시험 100점을 맞겠다고 약속해! 그래야 보내줄 수 있어."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YES였고 그때부터 일본어 공부를 필사적으로 했다. 반드시 가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그런 간절한 바람이 통했는지 기말고사는 100점을 받았고 가까스로 일본 홈스테이 행렬에 동참할 수 있었다.


때는 2004년 7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선생님들 및 학생들을 포함한 홈스테이 일행 약 40여 명은 인천공항에서 일본 간사히 국제공항행 비행기를 타고 오사카(大阪)로 향했다. 오사카성과 그 주변일대를 둘러보고 버스를 타고 홈스테이 예정지인 돗토리현 요나고시(鳥取県米子市)로 갔다. 그러나 생애 첫 해외여행이라 설렘 가득했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때마침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 에어컨이 고장 났기 때문이다.


약 4시간 동안 찜통더위와 싸우며 간신히 도착한 요나고시. 시청에 마련된 한 강당으로 안내를 받은 우리 일행은 본 행사 취지와 기간 동안 함께 지내게 될 홈스테이 멤버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같은 반 친구와 함께 한 아주머니집에 배정을 받았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뒤늦게 합류한 터라 또래가 있는 가정 섭외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리를 만들어준 선생님과 우리를 받아 준 아주머니댁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인사가 끝나고 나서 아주머니 차를 타고 도착한 한 주택. 2층짜리 목조주택으로 일본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보던 그런 집이었다. 집에는 아주머니 부부와 아이 둘이 있는 큰 딸 부부와 일 다니고 있는 작은 딸까지 총 7명이 살고 있었다.


이튿날부터 홈스테이 단체 또는 가족들끼리 개별 일정을 소화했다. 요나고시는 그리 크지 않은 작고 아담한 농촌 마을 같은 느낌이었는데 난생처음으로 보는 외국어로 된 간판이며 물건들까지 너무나 신기했다. 책 속에서만 봐왔던 일본어들이 (비록 한자가 더 많기는 했지만) 여기저기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보다 더 화려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일본어라고는 인사말인 오하요고자이마스(おはようございます)나 감사합니다를 뜻하는 아리가토(ありがとう) 정도. 그러나 일본인들과 손짓발짓하며 소통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가슴 따뜻해지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중 일본에 대한 인상을 바꾼 결정적인 에피소가 하나 있다. 요나고시 인근에 있는 유적지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직 스마트폰이 있기 전 시절이기에 아주머니가 손수 프린트한 지도를 보면서 목적지로 향했다. 그런데 도통 길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분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그 행인(물론 일본인)은 자신이 알고 있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그렇게 그를 따라서 한 5분 이상 걸었을까?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주머니를 비롯해 모두들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다. 한국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을 일본에서 경험하게 되었고 내 마음속 구석 어딘가에 남아 있던 '일본 = 나쁜 나라'라는 프레임에 비로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일본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고 '일본어 선생님'이라는 새로운 꿈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나 보다. 공부와 거리가 멀었기에 사범대 갈 성적이 되지 않아 교직이수를 할 수 있는 일본 계열 전공을 선택. 이마저도 2자리 T.O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결국 3등으로 밀렸고 복수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하면서 일본과 관련된 흥미는 점점 식어가게 되었다.


어느덧 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2013년 3월. 모 기업 해외영업팀 소속으로 첫 발을 호기롭게 내뎠다. 그나마 일본어 점수는 있었으니 일본어를 활용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취업활동을 했었다. 당연히 회사에서도 일본을 오가며 영업활동을 하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도 있었고.


그런데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분명 회사 홈페이지에도 일본지사가 있다고 나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예전 자료. 일본 회사들과 거래를 하는건 사실이지만 주요 바이어들 소재지는 베트남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회사였다. 베트남으로 파견 갈 운명이었던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지 않았던 베트남이라는 나라에 대한 두려움과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업무. 그로 인해 상사에게 깨지기를 밥먹듯이 하는 하루하루.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 끝나는 엔딩 음악소리가 세상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 인생을 통틀어 또 있었을까?


그렇게 자존감이 바닥 저 밑으로 떨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선배형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나, 회사 그만두고 일본 워킹 홀리데이 갈 거야."


너무나 뜻밖이었다. 어렵게 취업해서 서울에서 일을 잘하고 있던 형이었는데 갑자기 일본을 간다니? 그것도 취업도 아니고 워킹 홀리데이로. 너무 무모하지 않나 생각 하던 찰나 불현듯 번쩍이는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나도 가보자. 일본!'


정말 순식간에 진로를 뒤바꾸는 결정을 해버리고 말았다. 바로 워킹 홀리데이 신청서를 넣었고 일본에 가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 있을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정부지원 해외인턴'이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고 망설임 없이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회사에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3개월이라는 짧은 첫 사회생활을 마무리 한 뒤 준비를 거쳐 정부지원 해외인턴에 최종합격하였고 2013년 9월 일본 도쿄로 떠나게 되었다. 비록 1년간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워킹 홀리데이에는 떨어져 관광 비자로 (1번 입국에 최대 90일) 가야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참 재밌다. 90일, 길어야 180일 정도를 예상했던 일본생활을 10년이나 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일본은 책, 그리고 가끔 관광으로나 만나 보던 존재가 아닌 내 삶의 터전 그 전부가 되었다.


이번 브런치북에서는 지난 10년간 일본에서 보고 느꼈던 경험들을 그려나가 볼까 한다. 1년 12달 변화에 맞추어 그 안에 살아가는 한국인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이 글을 통해 일본에 대한 올바른 이해(비판)와 또 다른 삶의 터전으로서 검토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일본 홈스테이 마지막날 가족들과 헤어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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