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큰 책장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일본어 회화책 하나가 꽂혀 있었다. 원래를 하얀색이었을 페이지들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다만 검은색 잉크로 인쇄된 문자들만은 선명했다. 오십음도(五十音図)에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히라가나인 ゐ(wi)와 ゑ(we)마저 실려 있었다. 어머니가 고등학교 시절 공부하려고 사두었던 책이라고 했다.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있던 것이다.
중등과정에서 제2외국어를 배운다.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나는 그중 일본어를 선택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영어가 싫었고, 우리말과 어순이 같기 때문이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명탐정 코난 등 좋아하던 애니는 모두 일본산이었기에 일본어를 배워두면 어딘가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둥글둥글하고 귀엽게 써진 히라가나는 남중을 거쳐 남고로 진학한 나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남자처럼 거친 느낌이 있는 가타카나는 정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외래어 말고는 거의 히라가나가 쓰인다는 설명에 일본어 공부가 괜스레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작정 연습장에 あ(아)를 써보았다. 부드러운 글씨와 손맛, 어딘가 포근하고 따뜻했다.
고등학교 2학년, 기다리던 일본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미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익힌 덕에 그제야 처음 문자를 외우던 다른 친구들에 비해 앞서갈 수 있었다. 다행히 일본어 성적은 좋았고 1학기 기말고사에 100점을 맞으면서 일본 홈스테이에 참가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그렇게 난생처음 일본 땅을 밟게 되었다.
일본 돗토리현 요나고시. 동해안에 인접한 지역으로 인구 14만의 소도시다. 3박 4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일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교류와 문화체험을 하는 시간이었다. 이때 할 줄 아는 말은 고작 아침인사, 오하요고자이마스나 감사인사, 아리가토 정도 수준이었다. 대부분 의사소통은 바디랭귀지와 짧은 영어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나를 맞이해 주었던 일본 가정의 정이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와닿았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인생목표가 생겼다. 일본과 관련된 전공을 하고 싶었고 일본어 선생님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일어교육과 진학을 준비했고 차선책으로 교직이수 가능한 대학을 알아보았다. 비록 수능시험에서 절망스러운 결과가 나왔지만 지역 국립대에 교직이수 가능한 과가 있어 그리로 진학했다.
1학년은 학부제도로 2학년부터 과로 갈린다. 그중 일본어 교직이수가 가능한 학과는 인기학과. 어렵사리 평균 A0 성적으로 목표과에 진학했다. 이후 전공다운 커리큘럼으로 일본어 문법에서부터 한자, 회화, 독해, 작문 수업까지 수강했고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마쳤다. 다만 교직이수는 학과 내 3등으로 미끄러졌고 이후 군에 입대했다.
일명 일꺽이라고 하는 일병 중반부터 연등(취침시간 이후 상관의 허가를 받아 공부 등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다.) 시간을 이용해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입대 전에 JLPT 2급을 취득했지만 상급인 1급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었다. 2010년, JLPT가 N등급으로 변경되기 전 마지막 시험이 있었다. 주말 외출을 이용해 시험을 치렀고 다행히 1급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이 날, 비번이었음에도 시험장까지 나를 바래다준 직속상관의 은혜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군 전역 이후 경영학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교직이수에 실패했으니 남은 건 취업뿐이었다. 경영, 마케팅, 회계 수업을 들으며 (지식적으로) 사회에 대해 익혀나갔다. 그 과정에서 이수학점 문제로 일본 교환학생은 포기했지만 일본어에 대한 끈은 놓지 않았다. JPT 단체시험에서 900점대 성적을 거두었고 JLPT N1도 취득했다.
취업은 일본 해외영업만을 노렸다. 혼자 카메라를 켜고 일본어 면접연습 준비도 했다. 반년 간의 취업재수 끝에 원하던 회사에 입사했다. 캐리어를 끌고 일본으로 출장 가는 모습을 수도 없이 상상했다. 하지만 일본 출장 기회는 하늘의 별따기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일본 오피스가 있다고 명시된 회사 홈페이지 정보는 과거 데이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바이어가 회사를 방문했을 때 인사 말고는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그랬다. 읽고 쓰는 건 되지만 말하기(회화) 실력이 턱 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수습기간 끝남과 동시에 사표를 내고 일본행을 택했다. 도쿄 소재 한인기업 인턴으로 6개월간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기간 동안 어떻게든 말문을 트겠노라 다짐했다. 한국어를 잘하는 일본인 스텝의 도움으로 일본어 연습을 했고 전화로 비품주문 하는 일(연습)도 했다. 그러면서 드라마 스크립트를 듣고 외우고 따라 말했다. 한국인이 8 할인 회사이기는 했지만 일본어를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다행히 조금씩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고 인턴에서 정사원으로 채용되었다.
일본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일본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도 늘어났다.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는 일부러 모임에 참가해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일본어로 웃고 떠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꿈도 일본어로 꾸기 시작했다. 한국어보다 일본어 표현이 먼저 생각나는 경험도 이때 처음 하게 되었다. 일본어로 말할 수 있게 되니 자신감도 생겼다. 여기서 욕심을 더 내서 한인기업이 아닌 일본기업으로 이직도 시도했다. 일본에서 몇 가지 자격증도 취득했다.
일본에서 총 4차례 이직을 했다. 마지막 회사에서는 (당시 시점) 유일한 외국인 팀장이었다. 회사에 있는 8시간 동안은 오로지 일본어만 썼다. 일본어로 말하고 듣고 쓰고 읽고. 80%의 이해와 20%의 눈치와 경험으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생존했다. 소위 말하는 네이티브급은 아니지만 일하는데 일본어가 문제 되는 일은 없었다.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일본어가 특기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지금은 평생의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일본어 원서를 읽는다. 뉴스를 보고 메일을 쓴다. 일본어로 전화를 한다. 일본어가 없는 삶이 상상이 안될 정도다.
이번 브런치북을 통해서 일본어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에피소드들과 공부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일본어 선생님이 되지는 못했지만 글을 통해 그동안의 경험을 전달하고 싶다. 한 사람이라도 이 글로 일본어가 공포에서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경험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일본어, 사랑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