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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민 Sep 22. 2024

Ep1| 히라가나, 카타카나 깜지 쓰기

일본어를 그리다


일본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거실 책꽂이에 꽂혀있던 색 바랜 일본어 회화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펼치니 머리말을 지나 오십음도표가 등장했다. 영어 공부할 때도 A, B, C, D부터 공부했으니 일본어도 히라가나부터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기간이 아닌대도 샤프와 연습장을 꺼내 자발적으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오십음도표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표는 모음 5단과 자음 10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제일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이 표 최상단에 위치한 아, 이, 우,에, 오. 둥글둥글 귀엽게 생긴 아(あ)행의 글자들. 한글을 연필로 적을 때는 ‘쓴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는데 일본어, 히라가나는 ‘그리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한자에서 빌려온 문자라 그런지 획을 긋고 둥글게 말아 올린 후 삐침을 추가한다. 가는 샤프로 쓰는 것보다 굵직한 사인펜으로 쓰는 게 더 맛깔난다. 발음도 얼마나 쉬운지! 일본어의 가장 처음이 너여서 고맙다는 말을 이제라도 하고 싶다.


あ、い、う、え、お

아, 이, 우, 에, 오


이후로 카(か行)행이 시작된다. 카행은 조금 혼란스럽다. 우리나라 일본어 표기법에서는 카를 가라고 한다. 도쿄 신주쿠의 환락가인 카부키쵸의 카부키(歌舞伎:かぶき)는 가부키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일본 드라마나 애니를 볼 때 분명 ‘카’라고 발음했는데 ‘가’라고 표기하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에 탁음을 배우면 등장하는 가(が)도 있다. 카도 가로, 가도 가로. 그래서 일본어를 외국어로 공부하는 동안은 잠시 표기법을 잊기로 했다.


か、き、く、け、こ

카, 키, 쿠, 케, 코


일본음식 중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스시(すし)는 사행(さ行)의 두자로 이루어진 단어다. 사, 시, 스, 세, 소. 일본어를 몰랐을 때부터 좋아한다는 말을 스키(すき)라고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스~하고 가늘게 치고 빠지는 매력이 있다. 획을 긋고 위에서부터 밑으로 치고 내려가 둥글게 꼬리를 한번 말고 내려가며 완성되는 스(す). 귀여운 아기돼지 같다. 좋아하기 좋은 글자다.


さ、し、す、せ、そ

사, 시, 스, 세, 소


드래곤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캐릭터가 있다. 손오공의 와이프인 치치(ちち). 일본어로 우리 아빠를 찌찌(ちち)라고 하니 같은 표기를 하고 있다. 이미 타행(た行)의 한 글자는 마스터다! 이런 수월함이 있는 동시에 곤혹스러운 글자가 등장하는데 행 가운데 자리 잡은 츠(つ)다. 카행과 마찬가지로 외래어표기법과 실제 발음사이의 괴리가 있다. '쓰'라고 표기하는데 쓰와는 거리가 있다. 쓰나미(つなみ)는 츠나미라고 해야 비교적 발음이 유사해진다. 우리말에 없는 발음이다 보니 어렵다. 그 생김처럼 어딘가 우여곡절이 있는 아이다.


た、ち、つ、て、と

타, 치, 츠, 테, 토


히라가나 환장파티


어느덧 히라가나 쓰는 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던 수준에서 문자를 쓰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는 술술 풀려나가리라. 나, 니, 누 , 네, 노. 크게 어렵지 않다고 안심하고 넘어가려는 순간, 잠시 급제동이 걸렸다. 누(ぬ)와 네(ね) 때문이다. 획을 말아서 끝맺음 짓는 방식이 같은 두 문자. 아직 손과 눈에 익숙지 않은 탓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누가 네인지, 네가 누인지. 너는 누고 나는 네야! 라고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되뇌고 나서야 넘어갈 수 있었다.


な、に、ぬ、ね、の 

나, 니, 누, 네, 노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웃음소리가 아닐까. 예전에 보았던 어느 다큐에서도 글로벌 설문조사에서 좋아하는 소리 베스트 1에 웃음소리가 뽑혔다고 했다. 하행(は行)은 모두 웃음소리가 된다. 하하하, 후후후, 헤헤헤, 히히히, 호호호. 이번 행을 공부하는 동안은 손끝에서 조차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は:ha)가 와(wa)로도 읽힌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は、ひ、ふ、へ、ほ

하, 히, 후, 헤, 호


어느덧 히라가나 공부도 후반전에 접어들었다. 아행부터 타행까지는 그런대로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한눈에 동양인, 서양인 구분이 되는 것처럼. 그런데 나행부터 시작해서 마행이 다다르자 이게 나인지, 하인지, 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중 메(め)는 앞서 외웠던 누(ぬ)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밑 꼬리를 말고 가느냐 아니냐 차이다.


ま、み、む、め、も

마, 미, 무, 메, 모


그다음으로 맞닥뜨린 야행(や行)은 감사하게도 3자로만 되어 있다. 야, 유, 요. 생김새는 어딘가 아행과 비슷하다. 그래도 세 가지만 알면 되니 감사할 따름. 야행은 그 자체로도 쓰이기는 하지만 한글의 모음처럼 글자 옆에 붙어 새로운 음을 만들어 낸단다. 대신 작게 써서.


や、ゆ、よ

야, 유, 요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 라라라~♫ 콧노래가 절로 나오기 시작한다. 라행(ら行)는 한글 'ㅎ'과 알파벳 'Z'와 엇비슷한 위치다. 이쯤까지 히라가나라를 쓰면 샤프 밑단을 받치고 있던 오른쪽 중지 손톱밑 좌측면이 얼얼해진다. 그래도 종착점에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참아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한자씩 쓰며 외운다. 그런데 갑자기 급제동이 걸렸다. 레(れ)라는 글자와 마주치자마자 네(ね)가 떠올랐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로(ろ)는 루(る)와 비슷하다.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ら、り、る、れ、ろ

라, 리, 루, 레, 로


일본어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던 것보다 오십음도를 여기까지 써온 나 자신에게 감탄했다. 시험기간을 제외한다면 온전히 내 힘만으로 장시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와! 이게 되네?" 그런 놀라움이 담긴, 마지막 와행(わ行)다. 그리고 무려 야행보다 한 자 적은 두 자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내가 공부했던 교재에는 ゐ(wi)와 ゑ(we)가 있었지만 현대 일본어에서 발음은 '이(い)'와 '에(え)'와 같아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외우느라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복습할 필요 없음에 감사했다.


わ、を

와, 오


이건 마치 대문자와 소문자


마지막으로 오십음도에 속하지는 않지만 히라가나 맨 마지막에 자리 잡은 응(ん)이 있다. 이 글자는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받침의 역할만 한다. 그냥 물결모양으로 사인하듯 흘려 적으면 되니 금세 외워졌다. 이렇게 오십음도 공부가 끝이 났으니 본격적으로 일본어 세계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며 기뻐했다. 자막 없이 일본애니랑 드라마를 보고 여행 가서 프리토킹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에 펼쳐질 일본어 회화 내용을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제기랄...!


입밖으로 탄식이 세어나왔다. 손가락에 불이 나도록 연습장에 깜지를 쓰며 이제야 겨우 끝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카타카나(カタカナ)라는 새로운 히라가나... 아니 50음도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생긴 것도 어찌나 날카롭던지. 일본어가 귀여워서 시작했는데 이건 배신이었다. 영어에서 대문자와 소문자를 따로 외우던게 생갔났다. 생김새도 전혀 다르다. 심지어, 심지어! 더 안 외워진다.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수십번은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도 모르게 샤프로 손이 가더니 다시 아행(ア行)에서부터 와행(ワ行)까지 히라가나때와 마찬가지로 연습장을 빼곡히 채워가기 시작했다. 안 외워지면 외워질 때까지 썼다. 지금처럼 인터넷에 일본어공부 자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던 때도 아니었다. 요령은 없었다. 손이 기억할 때까지 또 쓰고 또 썼다. 유난히도 폭설이 많이 내렸던 속초에서의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일본어 공부로 손 시릴 틈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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