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거실 책꽂이에 꽂혀있던 색 바랜 일본어 회화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펼치니 머리말을 지나 오십음도표가 등장했다. 영어 공부할 때도 A, B, C, D부터 공부했으니 일본어도 히라가나부터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기간이 아닌대도 샤프와 연습장을 꺼내 자발적으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오십음도표를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표는 모음 5단과 자음 10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제일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이 표 최상단에 위치한 아, 이, 우,에, 오. 둥글둥글 귀엽게 생긴 아(あ)행의 글자들. 한글을 연필로 적을 때는 ‘쓴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는데 일본어, 히라가나는 ‘그리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한자에서 빌려온 문자라 그런지 획을 긋고 둥글게 말아 올린 후 삐침을 추가한다. 가는 샤프로 쓰는 것보다 굵직한 사인펜으로 쓰는 게 더 맛깔난다. 발음도 얼마나 쉬운지! 일본어의 가장 처음이 너여서 고맙다는 말을 이제라도 하고 싶다.
あ、い、う、え、お
아, 이, 우, 에, 오
이후로 카(か行)행이 시작된다. 카행은 조금 혼란스럽다. 우리나라 일본어 표기법에서는 카를 가라고 한다. 도쿄 신주쿠의 환락가인 카부키쵸의 카부키(歌舞伎:かぶき)는 가부키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일본 드라마나 애니를 볼 때 분명 ‘카’라고 발음했는데 ‘가’라고 표기하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에 탁음을 배우면 등장하는 가(が)도 있다. 카도 가로, 가도 가로. 그래서 일본어를 외국어로 공부하는 동안은 잠시 표기법을 잊기로 했다.
か、き、く、け、こ
카, 키, 쿠, 케, 코
일본음식 중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인 스시(すし)는 사행(さ行)의 두자로 이루어진 단어다. 사, 시, 스, 세, 소. 일본어를 몰랐을 때부터 좋아한다는 말을 스키(すき)라고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스~하고 가늘게 치고 빠지는 매력이 있다. 획을 긋고 위에서부터 밑으로 치고 내려가 둥글게 꼬리를 한번 말고 내려가며 완성되는 스(す). 귀여운 아기돼지 같다. 좋아하기 좋은 글자다.
さ、し、す、せ、そ
사, 시, 스, 세, 소
드래곤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캐릭터가 있다. 손오공의 와이프인 치치(ちち). 일본어로 우리 아빠를 찌찌(ちち)라고 하니 같은 표기를 하고 있다. 이미 타행(た行)의 한 글자는 마스터다! 이런 수월함이 있는 동시에 곤혹스러운 글자가 등장하는데 행 가운데 자리 잡은 츠(つ)다. 카행과 마찬가지로 외래어표기법과 실제 발음사이의 괴리가 있다. '쓰'라고 표기하는데 쓰와는 거리가 있다. 쓰나미(つなみ)는 츠나미라고 해야 비교적 발음이 유사해진다. 우리말에 없는 발음이다 보니 어렵다. 그 생김처럼 어딘가 우여곡절이 있는 아이다.
た、ち、つ、て、と
타, 치, 츠, 테, 토
어느덧 히라가나 쓰는 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던 수준에서 문자를 쓰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는 술술 풀려나가리라. 나, 니, 누 , 네, 노. 크게 어렵지 않다고 안심하고 넘어가려는 순간, 잠시 급제동이 걸렸다. 누(ぬ)와 네(ね) 때문이다. 획을 말아서 끝맺음 짓는 방식이 같은 두 문자. 아직 손과 눈에 익숙지 않은 탓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누가 네인지, 네가 누인지. 너는 누고 나는 네야! 라고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되뇌고 나서야 넘어갈 수 있었다.
な、に、ぬ、ね、の
나, 니, 누, 네, 노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웃음소리가 아닐까. 예전에 보았던 어느 다큐에서도 글로벌 설문조사에서 좋아하는 소리 베스트 1에 웃음소리가 뽑혔다고 했다. 하행(は行)은 모두 웃음소리가 된다. 하하하, 후후후, 헤헤헤, 히히히, 호호호. 이번 행을 공부하는 동안은 손끝에서 조차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は:ha)가 와(wa)로도 읽힌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