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학했다. 한 가지 특별할 게 있다면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겨울방학 내내 손에 불이 나도록 깜지를 써댔던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를 학교에서 마주할 시간이 다가왔다. 공부에 영 흥미가 없었지만 일본어 시간만큼은 기다려졌다.
수업 종소리가 울리자 교실 문을 열고 한 중년 남성이 걸어 들어왔다. 짧은 반곱슬머리에 네모난 안경, 살집이 있는 동그란 얼굴에 조금 튀어나온 배. 일본어 선생님과의 첫 대면이었다. 어딘가 일본 드라마에서 보던 일본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본인의 이름을 한자로 적었다. 그리고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안녕하세요. 일본어를 맡게 된 장(張:ジャン)입니다. 초등학교 때까지 일본에서 살다가 왔어요."
기간제 교사로 새로운 선생님이어서 안면은 없었다. 그러나 낯설지 않은 외모와 일본에서 살다왔다는 말 때문이었는지 금세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인지 일본어 자체보다는 일본에서의 유년기 추억 이야기라던가 일본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어떻게 하면 안걸리고 잠을 잘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다른 수업때와는 달리 말똥말똥한 눈으로 집중해서 들었다. 일주일에 두 시간밖에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럽기까지했다.
레- (礼:れい. 수업시작 전 '차렷, 경례' 하는 것과 비슷한 일본의 수업인사 방식)
요로시쿠오네가이시마스 (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잘 부탁드립니다.' 일본어 표현)
수업은 일본학교와 같은 인사로 시작되었다. 교과서 첫 페이지는 히라가나 익히기다. 다른 아이들이 이제야 둥글둥글한 일본 문자를 접하기 시작했다. 나 홀로 페이지를 뒤로 넘겨 인사, 소개, 취미 등 다음장으로 진도를 나갔다. 선행학습의 묘미를 제대로 만끽했다. 히라가나만 공부할 때보다 더 재미있었다. 적어도 일본어만큼은 우등생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6월이 찾아왔다. 날도 제법 더워지기 시작했다. 교실에 있는 벽걸이 선풍기 4개 모두 고개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바람을 날려 보냈다. 여느 때처럼 수업이 끝나고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때 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여름방학 '일본 홈스테이' 참가단 모집. 당시 서울과 지방학생들 간 홈스테이 교류는 종종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포스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기간은 3박 4일에 모집인원은 속초시내 중등학교 20명 내외, 선발기준은... 내신 성적.
사실상 공부와 담을 쌓았기 때문에 내신은 바닥이었다. 20명 안에 들어가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일본어 선생님이 이번 홈스테이 운영단장이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이 많이 참가하면 좋겠다고 했다. 몇몇 내신 좋은 아이들이 참가신청을 했다. (물론 일본어는 내가 그들보다 위였다.) 나와는 연이 없다고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며 한 주, 두 주를 보냈고 모집이 마감되었는지 포스터가 떼어졌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내용이 잊혀지지 않았다. 때마침 청소담당 구역이 일본어 선생님이 계신 학생 주임실이었다.
"선생님, 저 일본 홈스테이 너무 가고 싶어요!"
> "미안하지만 안돼. 이미 모집인원 마감 되었어."
"방법이 없을까요? 수업시간에 말썽 안 부리고 열심히 잘 들을게요.. 제발..!"
> "음... 좋아. 내가 어떻게든 자리 추가로 만들어 볼게. 대신 기말고사에서 100점 맞는다는 조건이야."
"감사합니다!"
학생 주임실에 선생님이 계실 때면 홈스테이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이 안된다고 하면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돌아 섰지만 쉽사리 포기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또 다음날도 계속해서 찾아갔다. 선생님이 안 계실 때를 대비해 적어둔 장문의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나오기도 했다. 어느새 선생님도 지치셨는지 아니면 내 진심이 느껴졌던 것인지 조건부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기말고사에서 일본어 100점을 받았다.
강원도 속초시는 일본 돗토리현 요나고시(鳥取県米子市)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다. 홈스테이 출발 첫날, 단체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문화체험을 위해 오사카에 들러 오사카성을 둘러보고 요나고시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버스로는 약 4시간에 걸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풍경들이 신기할 법도 했지만 30도를 넘는 폭염과 에어컨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는 낡은 버스 탓에 땀범벅이 되어 거의 실신상태였다.
어느덧 도심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고즈넉한 바다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착한 곳은 동해바다와 인접해 있는 사카이 미나토(境港)였다. 이 지역 출신인 일본 만화작가 미즈키시게루의 이름을 딴 거리(水木しげるロード)에 들러 기념사진촬영을 했다. 일본 대표 호러만화인 게게게노 키타로(ゲゲゲの鬼太郎) 캐릭터들이 거리 곳곳에 등장한다. 만화(2차원)와 현재(3차원)가 공존하는 세상. 이곳이 일본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이후 요나고시 시청(米子市役所)으로 향했다. 내부에 자리 잡은 홀에는 한국 홈스테이단을 맞이할 일본참가단이 나와 있었다. 우리와 나이대가 비슷한 일본 아이들과 그의 부모님들이었다. 간단한 환영식 겸 오리엔테이션을 한 후 하나, 둘 매칭된 가족들과 떠났다. 그나저나 나(와 같은 반 친구)를 맞이할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주머니 한분이 우리에게 오셨다. 살짝 파마를 한 듯한 단발머리에 150cm 즈음되어 보이는 작은 키에 통통한 체격. 꼭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았다. 일본어 선생님이 오셔서 간단히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이미 가족 모집 T.O가 찬 이후라 급하게 추가 가정을 모집했고 이 분이 우리를 받아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우리 또래는 없고 남편과 성인이 된 두 딸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마티즈처럼 보이는 작은 일본 경차에 캐리어를 싣고 아주머니 집으로 향했다. 논밭이 보이는 길을 지나 꼭 짱구는 못 말려에서 본 듯한 이층집 단독 주택에 도착했다.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두 딸의 엄마인 큰 딸 부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누나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저녁으로는 카레를 만들어 주었다. 한국에서 먹던 카레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진하고 맛있었다. 밥도 듬뿍 담아 주었다. 카레를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적이 또 있었을까. 일본어 시험 100점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일본어라고는 하지메마시테(처음 뵙겠습니다), 아리가토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 정도가 전부였다. 알고 있는 일본어를 총동원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샤워까지 마치고 긴장이 풀어졌는지 잠자리가 준비된 타타미 방에 눕자마자 잠이 들어 버렸다.
이윽고 다음날이 밝았다. 평소와 다른 방안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금세 이곳이 일본임을 자각했다. 둘째 날은 홈스테이단 단체관광 일정이었다. 한일우호교류공원 바람의 언덕 (日韓友好交流公園「風の丘」), 전통사찰, 대형마트 쟈스코(현재의 이온몰)등 주요 관광지와 상업시설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속초에 이마트도 생기기 전이었기에 같은 바다 도시임에도 정갈하고 더욱 발전한 듯한 모습에 어딘가 모르게 매료되었다.
셋째 날은 자유일정. 우리 가정과 인근에 있던 다른 가정이 한 팀이 되어 움직였다. 오전에 찾아간 곳은 호우키코다이 언덕 공원(伯耆古代の丘公園). 고분군이 있는 공원이다. 아주머니 차를 타고 목적지 인근에 도착해 주차 후 도보로 이동했다. 그런데 아주머니도 길이 낯선지 한참 헤매기 시작했다. 아직 스마트폰이 있기 전이라 지도를 프린트해서 온 상황.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중 때마침 길을 지나가는 행인을 발견했다. ‘스미마셍’이라고 운을 띄운 후 자초지종을 설명한 아주머니. 그 말을 듣고는 본인도 그쪽으로 지나가는 길이라며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대화 내용은 어디까지나 내 추정이다). 대략 3분 넘게 걸었을까 목적지 입구에 도착했다. 우리 모두는 그에게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분은 겸연쩍은 미소를 보이고는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일본사람의 친절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
무사히 공원을 둘러보고 근처 유도관에서 유도 체험을 했다. 저녁이 되어서는 집 근처 공원에서 마을 사람들과 모여 바비큐 파티를 했다. 비슷한 또래 친구들도 제법 모였고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 풋살을 즐겼다. 운동에는 영소질이 없어 '공'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나였지만 이날만큼은 얼굴이 터질 만큼 달렸고 신나게 공을 찼다. 이만한 한일교류가 또 있을까.
어느덧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었다. 고기와 음식들을 접시에 담아 아무 옆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말이 통할리 만무했지만 알고 있는 일본어, 영어 단어, 그리고 바디랭귀지로 한참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함께 사진도 찍고 메일 주소도 교환했다. 길 줄만 알았던 3박의 일정은 마치 3초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덧 다시 한국으로 떠나는 아침이 밝았다. 그새 정이 들었던지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 코 끝이 찡해져 왔다. 마지막으로 집 앞마당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아쉬움을 뒤로 한채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때부터였을까. 가슴속에 묘한 고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좋아하는 이성을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이 증상은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쉽사리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진로상담시간이었다. 인문고 이과반이었던 나는 돌연 문과로 전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연히 담임 선생님은 반대했다. 대부분의 이과 선생님들도 반대했다. 그러나 고집을 굽힐 수 없었다. 인생 처음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원하던 대로 문과 3학년 생이 되었다.
‘꿈을 가르치는 일본어 선생님!’
인생 처음 비전(VISION)이 생겼다. 일본어 선생님 덕분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도 자유롭게 소통하고 싶어졌다. 고동의 이유를 찾은 것이다. 아직 고동조차 느끼지 못한 후배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선생님이 되리라!
수능까지 남은 시간은 단 1년. 일어교육과에 진학해 일본어 선생님이 되는 것, 그것만이 내가 꿈꾸는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