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는 몇몇 유명한 장소가 있다. 오늘은 그중 하나인 이라체 샘을 지나간다. 공짜 와인이 콸콸 쏟아진다는 곳. 제이는 이날을 위하여 미리 빈 생수통을 챙겨놓았다.
이라체 샘
이라체 샘에 도착하니 벌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인 꼭지를 에워싸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다가갔더니, 세상에, 와인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단념하고 길을 떠나는 사람, 아쉬움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인터넷에 검색하는 사람. 누군가가 말했다. 오전 8시부터 나온대요! 우리는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약속의 8시가 되었고, 와인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이젠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제이는 허망하게 빈 생수통을 꺼냈다. 물이라도 담아갈래.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생긴 물집은 아직 낫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배운 대로 물집에 바늘을 찔러 넣어 실을 꿰어 두었는데, 겁이 많아서 잘하질 못한 모양이다. 게다가 1년 전 조깅을 하다가 다친 아킬레스건이 다시금 쑤셔왔다. 제이는 10년 전 족구를 하다가 아킬레스건이 끊어져서 수술을 받았다. 그의 왼쪽 발뒤꿈치에는 지금도 그 수술 자국이 선명하다. 그 흉터는 마치 경고장 같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너도 이렇게 된단다 같은.
아픈 발을 달래면서 절룩절룩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알베르게 숙박 전쟁에서 또 패배하여, 오늘은 주방과 화장실이 딸려있는 원룸형 숙소를 빌렸다. 숙소에 들어가 창에 달린 덧문을 열었더니 방 안 가득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어떠한 환영 인사도 이보다 더 따뜻할 순 없었다.
우리집에 있는 것처럼 넉넉하게 샤워를 했다. 그동안 비좁은 데다 샤워부스와 탈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공용 샤워실에서 조심조심 샤워를 했었다. 혹여 물이 튀어 여벌 옷이 젖을라, 문고리에 아슬아슬 걸어둔 속옷이 바닥에 떨어질라. 이곳에서 내 옷들은 샤워기의 습격에도, 낙하 사고에도 안전하다. 해바라기 샤워기 아래에 서서 신나게 물줄기를 맞았다. 물줄기가 등을 맞고 난반사되어 튀어나가도 샤워부스 문이 거대한 방패처럼 내 옷을 보호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오늘 메뉴는 삼겹살. 스페인어로 삼겹살이 뭔지는 모르지만, 30년 넘게 먹어온 친구니까 보면 알 수 있다. 스페인 라면도 하나 샀다. 집에 와서 삼겹살을 굽고 라면을 끓였다. 스페인 라면의 면만 꺼내서 한국에서 사간 라면 스프를 넣었다. 여기는 이미 우리 집이었다.
햇볕이 참 좋은 날이었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었다. 침대에 누워서 아픈 발에 햇볕을 쪼였다. 발가락 사이에 난 물집에 바람이 지나갔다. 시원하고 나른했다. 발이 금방 나을 것 같았다.
우리는 마을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아멘뿐이었다. 그래서 신부님의 말이 외국어로 지어진 음악처럼 들렸다. 나는 그 경건한 음악을 들으며 기도했다. 내가 행복하기를, 제이가 행복하기를. 달리 바랄 것은 없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을 나서니 짙은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우리집으로 가는 골목을 걸었다. 어느 집 대문 앞에 이동식 욕조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거품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일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여긴 까미노의 스윗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