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아르코스~비아나(Viana), 로그로뇨(Logrono)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비아나(Viana)라는 마을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둘째 날 아침, 아침 식사를 하던 바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국인 아주머니였다. 산티아고 길을 꼭 와보고 싶었다며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시던 그분이,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마을의 골목길에서 산책을 하고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했더니, 아주머니는 고급 정보를 알려주셨다. 오늘 열두 시에 이 마을에서 축제가 열린다는 것이다. 소몰이 축제라고 했다.
우연히 만나는 지역 축제라니, 여행자의 로망 덩어리 그 자체 아닌가.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소를 모는 축제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지만 우리는 한번 기다려 보기로 했다.
성당과 상점 사이의 골목길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아마 여기가 본무대인 것 같았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와인잔을 손에 들고 축제 전 한잔을 즐기던 사람들도 울타리 뒤쪽으로 안전하게, 하지만 소몰이를 잘 볼 수 있는 자리로 옮겼다. 와인을 팔던 사장님은 야외 테이블을 정리하고 가게 앞문에 나무 덧문을 대었다. 승패를 예측하는 복권인 듯 숫자가 쓰인 종이를 파는 상인이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부지런히 지폐를 받아갔다.
축제 본무대인 골목길에 접하는 집에 사는 이들은 자기 집 발코니 문을 열고,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여유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강변에 사는 이가 집에서 여의도 불꽃놀이가 보인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저들도 ‘우리 집에선 소몰이 축제가 한눈에 보인다구!’ 라며 자랑할까? 마을 주민들은 모두 위아래로 하얀색 옷을 입고 목에는 빨간색 삼각 스카프를 두르거나 빨간색 허리끈을 매었다. 축제 드레스 코드인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동시에 땅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짐승의 냄새가 다가왔다. 검은색 소 2마리가 두두두두 달려오고 있었다. 소 앞에는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소뿔에 받치지 않고 무사히 달려내어 용기를 과시하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흰 옷에 빨간 스카프를 두른 마을 청년 몇몇이 커다란 나무판자를 각목으로 쳐서 큰 소리를 내며 소를 흥분시켰다.
다음 러너가 등장했다. 이번 러너는 운동복 차림에 빨간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순례객이 틀림없었다. 어쩐지 응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를 모르고, 소 앞에서 처음 봤지만 우리는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지이므로. 소는 아까보다도 더 흥분했고 그는 그 앞을 무사히 달려내었다. 빨간 스카프까지 사서 이 축제의 일원이 된 그 남자야말로 진정으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행여 소가 이쪽으로 올까 울타리를 붙잡고 다른 이가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던 내 모습에 그만 열등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빨간 스카프는 살 수 있어도 잔뜩 성이 나고 내 엉덩이를 뚫을 수 있는 뿔을 가진 소 앞을 뛸 수는 없다. 소뿔을 보기만 했는데도 괜히 엉덩이가 간지러웠다. 그냥 각자의 방법으로 그 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목적지 로그로뇨에 도착했다. 짐 배송 서비스로 보낸 가방을 찾으러 갔다. 내 가방이 없다고 했다. 나는 로그로뇨 공립 알베르게도 가보고, 그 옆집 알베르게도 갔다. 가방은 없었다.
짐 배송을 해준 미구엘은 확실하게 내가 지정한 알베르게에 배달했다고 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처음 들렀던 알베르게에 다시 갔더니 이번엔 내 가방이 있다고 했다. 가방이 어디서 솟아난 거지? 어디서 솟아났냐면, 내 돈 10유로에서 솟아났다. 그들은 짐 보관비라며 10유로를 요구했다. 10유로는 너무 비싸다고 항의했지만, 그들은 “나도 알아.”라고 말할 뿐이었다. 아는 사람이 그래? 가방 인질극에서 나는 몸값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