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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부 Jan 27. 2024

11일차. 버스 터미널 앞 바에서 일기를 쓴다

로그로뇨~부르고스(Burgos)


로그로뇨에서 부르고스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출발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아서 버스 터미널 앞 바에서 시간을 때웠다.



스페인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카페 콘 레체를 주문했다. 샌드위치도 함께 주문하여 아침식사를 했다. 휴대폰을 켜고 코카콜라 주식을 만 원어치 주문했다. 미래의 내가 테이블 아래에서 ‘야 그거 사지 마! 너 지금 마이너스야!’라고 외치는 것을 못 들은 모양이다. 코카콜라병 중증인 나는 날마다 코카콜라를 마셨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코카콜라부터 마셨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는 한 코카콜라는 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카페콘레체와 샌드위치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남아서 일기장을 꺼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자아 성찰을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일기장을 챙겨 왔지만 거의 쓴 적이 없었다. 순례길의 하루는 의외로 바빴다. 열심히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한다. 오늘 잘 곳을 찾고, 오늘 입은 옷을 빨고, 나 자신을 먹이고, 씻기는 일이 끝나야 비로소 일기를 쓸 수 있다. 게다가 일기를 쓰려면 생각에 잠길 시간과 글씨를 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일기는 매우 사치스러운 행위라는 것을 절감했다.



오늘은 그 사치를 누려보기로 한다. 펜을 쥐고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갈겨썼다. 나는 내 진심을 알고 싶었다. 플랜 A의 실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왜 때때로 우울해하는지.


진심이는 정제된 글을 쓰려고 똑바로 앉으면 저 어딘가 숨어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최대한 악필로, 개발새발 갈겨써야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쓰면서도 직감한다. 이 글, 나중에 읽으면 세상 저 끝까지 도망치고 싶을 만큼 창피할 것 같은데. 내 일기장의 세상에서는 창피함의 정도가 곧 진심이 나오는 정도인 듯싶다.


일기장에 갈겨쓴 글씨


시작은 가볍게, 신체의 고통에 대한 진심이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발과 다리가 아플 것만을 걱정했는데 의외로 가장 힘들었던 고통은 어깨 통증이었다. 무거울만한 짐들은 모두 동키 서비스로 보내버렸음에도 왼쪽 어깨가 아팠다. 15km 즈음 걸었다 치면 어깨는 바로 신호를 보냈다. 여느 할머니, 할아버지보다도 못 걷고 길 위에 서서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내가 안타까웠다. 집에 가면 꼭 운동을 하리라고 진심이는 다짐했다.



플랜 A의 실패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실패는 아프지만 그저 헛짓거리는 아니었다고 했다. 플랜 A는 줄곧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 미련은 아주 많은 시간을 잡아먹으며 쑥쑥 컸다. 코끼리만큼 거대해진 미련에 짓눌리다가 발작을 일으키듯 도전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진심이는 말했다. 미련은 거대했지만 다행히도 이번 실패로 바람이 쑥 빠졌다고 했다. 이제 짓누르던 건 없어졌다고, 산뜻하게 앞으로 걸어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가벼워졌으니까.



진심이는 내가 짜장면을 먹어 놓고 볶음밥을 먹었다고 말하는, 사소한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이유가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일로 마음의 공회전을 일으켜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고, 그래서 내가 때때로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버스 시간이 다 되어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일어났다. 종종 진심이를 만나러 일기장을 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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