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따르다호스(Tardajos)
산티아고 순례길 가이드북을 보면 보통 하루에 20km 정도를 걷도록 일정이 짜여 있다. 우리도 이를 따라 일정을 잡았다. 하루에 보통 20km, 많이 걷는 날은 25km. 아침 7시에 출발해서 오후 2시 즈음까지 걸으면 그날 몫의 걷기가 끝나는 것이다.
나는 이 스케줄이 버거웠다. 컨디션으로 미루어보아 최적의 일정은 오후 12시까지 걷는 것이었다.
‘저 죽을 것 같은데요, 하느님…’
이런 생각이 들 때 시계를 보면 기가 막히게 정오를 갓 넘은 시간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그 어떠한 철학적인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길을 걸으며 내가 구사하는 언어는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세 살배기만 못했다. 아파, 배고파, 힘들어. 사유와 자아 탐구와 명상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실 하루에 걷는 거리를 줄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은 직업인인 우리가 힘들게 낸 휴가였다. 하루에 20km도 안 걷고 어느 세월에 산티아고까지 간단 말인가. 이번에 못 가면 한 달이라는 시간을 또 어떻게 비운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걷는 거리를 줄여도 되는 걸까?
가장 나를 괴롭혔던 건 남들만큼 걷지 못한다는 자괴감이었다.
가이드북에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
“순례길은 경쟁하는 길이 아닙니다. 누가누가 더 빨리 많이 걷느냐 경쟁하는 코스가 아니에요.”
읽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말했다. 아 넵. 저도 알아요. 휴가까지 가서 뭔 경쟁을 또 하고 앉아있겠어요?
읽을 땐 당연했던 말이, 길 위에 섰을 땐 정말 어려운 말이었다. 알베르게에서는 오늘 40km를 걸었네, 50km를 걸었네 무용담을 늘어놓는 이들을 흔히 만날 수 있었다. 난 지금 20km가 힘들어서 줄일 고민을 하고 있는데! 심지어 난 아직 국가에서 청년으로 인정해 주는 나이인데! 산티아고 순례길 성적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내 점수는 D일 거야!
자괴감의 폭풍 속에서 마구 흔들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뭐 어때? 걔네는 오랫동안 걸을 수 있나 부지 뭐. 난 아닌 거고. 매사 쓸데없이 비장해서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사는 바람에 마사지사로부터 역대 3번째로 어깨가 딱딱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지만, 인생을 바꾸는 순례길이라니 여기서는 나도 좀 가벼워져도 되지 않을까. 무슨 업적 달성하는 것도 아니고, 산티아고 순례길 왔다가 산티아고까지 못 가면 또 어때. 남들 따라 하는 거 말고, 내 상태에 맞춰서 걷자. 이건 내 여행이니까. 나는 내게 허락했다. 조금 걸어도 괜찮노라.
출발지 부르고스에서 다음 마을인 따르다호스까지는 11.5km였다. 일단 여기까지 끊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마치 강아지에게 말을 걸듯 다정하게. 이만큼은 괜찮니? 조금 늘릴까? 이대로 갈까?
이상하게도 나 자신에게 다정하길 허락한 그날은 좀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