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시간과 정신의 방이 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 보여서 시공간이 왜곡된다는 그곳. 바로 메세타다.
메세타란 스페인 북부의 평원 지대로, 끝없는 밀밭이 펼쳐져 있다. 가도 가도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려운 지역이라서 해는 필터 없이 백 퍼센트 그대로 내게 쏟아진다. 그래서 점프, 즉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일이 적극 권장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메세타 평원
따라서 우리도 메세타를 점프하기로 했다. 다만 아예 안 가면 아쉬우니까 딱 하루만 걸어보기로 했다.
아침 6시 반, 따르다호스 출발!
아침 6시 반, 따르다호스에서 출발했다.
메세타에는 햇볕을 가려줄 나무가 없어 순례자에게 ‘사막과 같은 열기’를 선사한다고 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일찍, 해가 뜨기 전 길을 나섰다. 휴대폰 플래시에 의존해서 걷다 보니 날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끝을 모르게 펼쳐진 노란 밑밭 위로 발갛게 해가 뜨고 있었다. 멈춰 서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세상의 공학인들이여, 더 열심히 일하십시오. 이 시간과 공기와 온도와 빛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주세요. 빨리요.
해가 뜨는 메세타. 실제로 보면 더 예쁘다구요
메세타 평원은 듣던 대로였다. 걸어도 걸어도 마치 같은 곳을 빙빙 도는 것처럼 주변 풍경이 변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하늘과 밀밭뿐이었다.
딱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건, 내 마음이었다. 나는 이 평원에 매료되었다. 그 단순함이 매력적이었다. 길은 계속 평탄했고 밀밭과 하늘도 그 모습 그대로 이어졌다. 시시각각 바뀌는 건 오로지 내 생각뿐이었다. 순례자들의 발소리만 타박타박 들리는 고요한 메세타에 내 생각만이 소란했다. 넷플릭스 메인에서 예고편을 돌려보는 것처럼 내 생각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생각의 고삐를 억지로 휘어잡아 어딘가에 집중하려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굳이 애쓰지 않았다. 처음 맛보는 해방감이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메세타 평원 한가운데에 우뚝 자리한, 외딴 알베르게였다. 케이크 한 조각에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메세타 평원을 질리도록 보겠노라 다짐했다. 하늘과 밀밭을 바라보다가 지치면 케이크를 조금 잘라먹었다. 그리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다 지루해져서 일기를 썼다. 오래전에 마음속 깊이 묻어두어서 있었는지조차 잊었던 감정이 볼펜 끝을 따라 기어 나왔다. 그러다가 왈칵 쏟아져내렸다. 볼펜은 정신없이 휘갈겨졌다. 후련해졌다. 체한 후 엄지손가락을 쑥 따내어 검은 피가 왈칵 쏟아진 것처럼.
케이크와 커피와 일기장
해가 지고 있었다.
별이 가득한 메세타를 보며 처음으로 이 길을 걷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길 위에 우뚝 서버리고 싶었던 순간순간들이 모두 보상받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