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두부 Mar 13. 2024

15일차. 남의 말도 한 번은 듣자

온타나스~레온(León)

대점프의 날이었다. 메세타를 하루 ‘찍어 먹어보고’ 나머지 구간은 버스로 이동하는 것이다. 알베르게 주인에게 레온행 버스 타는 곳까지 갈 택시 예약을 부탁했다. 그는 버스 예약을 했냐고 물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버스가 다른 길로 가서 그 정류장을 들르지 않는다고 했다. A에서 B를 거쳐 C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치자. B에서 탑승 예약이 없으면 B를 들르지 않고 A에서 C로 바로 간다고 했다.



우리는 이 룰을 몰라 이미 버스를 놓친 전적이 있었다. 구글 지도를 믿고 버스가 온다는 시간에 맞춰서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택시를 불러주었던 바 주인이 예약을 하지 않으면 버스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도통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여서 나는 그녀의 서툰 영어 탓을 했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내가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 말고, 다른 사람의 말도 들어야 버스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아침 여덟 시. 택시가 왔다. 화장실에 들렀다 갈까, 잠깐 생각했지만 이미 온 택시를 기다리게 하기가 미안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안녕, 메세타


택시는 한참을 달려 레온행 버스가 정차하는 곳에 내려주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마을에 있는 바에서 콜라를 한잔 마시고 화장실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나는 순례길을 걸으며 스페인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은 바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마을에서 꼭두새벽부터 깨어있는 것은 늘 순례자와 바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바 주인은 예외였는지, 아침 9시가 지났는데도 문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이 게으른 사람. 화장실 게이지가 50퍼센트 차오른 나는 약간 초조해져서 엄한 바 주인을 탓하고 말았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버스가 왔다. 레온까지는 2시간 40분의 여정이었다. 방광 수위는 현재 50%. 뇌를 속이는 작전을 쓰기로 했다. <방광? 그게 뭐?> 작전이었다.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



1시간 반 후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작전의 효력이 다했다. 갑자기 요의가 몰려왔다. 창밖을 보니 내가 탄 버스는 어느 바 앞에 정차하여 줄을 늘어선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지금 뛰어 내려가 바 화장실에 가면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타는 사이에 해결할 수 있을까? 줄고민을 하는데 버스가 출발했다. 이때 갔어야 했는데.



괜히 창밖 사진도 찍어보았다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가사를 음미해보려고 했다.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어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고통으로 요의를 잊어보고자 하는 원시적인 처방이었다. 효과는 딱 30초였다. 이제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버스는 사하군 역에 도착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죽음뿐이었다. 번역기 앱을 열어 스페인어로 화장실이 뭔지 검색했다. 바뇨. 바뇨였다. 그냥 ‘바뇨!’라고 외치면 되나? 바뇨 뿌르 빠보르? 버스는 매정하게도 내가 고민하는 새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옆자리에서 자고 있던 제이를 깨웠다. 그를 깨운다고 뭐가 달라질 건 없었지만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진다지 않는가.



“나화장실이너무급해미치겠어”



랩을 하듯 읊조리는 내 얼굴을 보고 제이는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괜찮겠어?’ 안 괜찮으니까 님한테 말한 겁니다. ‘어떡하지?’ 나도 몰라요. 제이는 의미 없는 말을 몇 번 하고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저기 문 옆에 화장실 아니야?”



나는 울컥 짜증이 났다.



이 버스는 슬리핑 버스가 아니고 세 시간짜리 버스라고.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도 아니라고. 이런 데에 화장실이 왜 있겠어?



이렇게 길게 말할 힘은 없어서 “아닐걸….” 한 마디를 간신히 뱉었다. 하지만 제이는 꺾이지 않는 남자였다.



“아니야 저거 화장실 맞는 거 같은데?”



도착까지는 30분이 남았고, 화장실 게이지는 99.7퍼센트였다. 나는 간절하게 제이 말이 맞길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며 계단 아래로 갔다.



버스 뒷문 옆에는 회색 문이 하나 있었고,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쓰여있었다. 암만 봐도 창고 같았다. 문을 열었다. 변기가 보였다. 여긴 창고다, 창고다, 창고다…. 주문을 외우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



남의 말도 들어야 하는구나. 교훈은 방광에 확실히 새겼다.


계단 옆 회색문이 화장실입니다.


이전 13화 14일차. 남들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아도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