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이 환자가 되긴 쉽지만 환자가 일반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새해가 밝았다. 힘들었던 지난해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2010년은 컨디션을 조금씩 회복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할 것이다. 병원에서 적은 버킷리스트 노트를 꺼내보았다.
첫 번째는 바로 수필 배우기였다. 고등학생 때 꿈이 작가여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갖고 있었다. 다만 마음을 못 먹고, 실천에 옮기지 못했었다. 이번 기회에 글쓰는 것을 배우고, 써보자고 생각하여 집 근처에 있는 구민회관의 수필 강좌를 신청했다. 구민회관은 집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떨어진 체력을 올리기에 딱 적당한 거리였다. 수업시간도 3시간 이하여서, 내년의 복학을 위해 나를 트레이닝 시키기에도 좋았다. 장시간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당시에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업 첫 날, 비니모자를 쓴 나는 홀로 버스를 타고 구민회관에 갔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는 거라 설렜다. 아프기 전에는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병을 겪고 난 후에는 특별한 일이 되었다. 얇은 다리로 버스에 타서 손잡이를 꽉 잡았다. 다행히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버스는 목적지에 잘 도착했고, 강의실에 들어가자 60대, 70대의 수강생 분들이 신기하게 쳐다보셨다. 평일 오전의 수업이라 젊은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도 모 대학교 국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다 은퇴하신 노교수님이셨다. 선생님도, 수강생도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었지만 글에 대한 열정은 이십대 못지않으셨다. 나도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저렇게 열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우선이었다. 수필을 쓰며 생각과 삶을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저것 자유롭게 쓰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다.
구민회관에서 들은 두 번째 강의는 연극이었다. 평소에 영화나 연극 보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종종 갔는데, 연극은 영화와 달리 배우들이 바로 앞에 있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펼쳤다. 맨 앞자리에 앉아 연극을 보면 마치 영화를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몰입되었고, 배우들의 생생한 에너지와 열정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런 에너지를 발산해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에너지와 열정이 남아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업에서는 연기할 때 말의 강약 조절과 감정 표현 등을 알려주었다. 회원들과 연극 대사를 주고받으며 캐릭터에 빠져들었고, 그 순간만은 환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 연기를 녹화해서 보았는데 어색한 발연기였고,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배우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그래도 새로운 것을 배우며 희열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