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유준 Feb 02. 2023

48. 6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실향민이셨다. 무일푼으로 내려오신 할아버지는 젊으셨을 때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성실하게 사신 결과, 자식들을 바르게 잘 키우시고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셨다. 하지만 가족 대부분을 북한에 두고 오셔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크셨고, 그만큼 자식에 대한 사랑도 크셨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의 첫 손주여서 아기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두 분은 내가 아팠을 때 정말 슬퍼하셨고, 아픈 모습을 보여드려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동생에게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아 건강이 많이 회복된 후, 할아버지 할머니께 자주 연락도 드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댁으로 찾아뵈었다. 

 하지만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어느 날 고령의 할아버지는 막혀있던 중요 혈관이 터지셔서, 중환자실로 입원하셨다. 나는 당시에 한 회사에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필 감기에 걸려서 할아버지 면회도 못 가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며칠 동안 누워계시다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장례식장으로 가서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자 울음이 터졌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지만, 막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면 세상이 무너지듯이 슬프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가족과 친척들은 3일 내내 할아버지를 위해 애도했고, 많은 조문객들이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찾아주셨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는 각 집안의 첫째 손주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피아노를 선물로 사주셨고, 손주들이 대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첫 등록금을 용돈으로 주셨다. 8명의 손주들을 끔찍이 사랑하시던 할아버지, 고향 생각이 나실 때면 우시던 할아버지. 북한의 가족과 헤어지신 지 60년이 지나서야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실 수 있었다.

* * *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 댁에서 친척들과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할아버지를 보낸 슬픔이 채 가시지 않았고, 3일장을 치르시느라 다들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때 휴대폰에 문자 한 통이 왔다. 내용을 보니 회사 면접시험에 합격했다는 문자였다. 우리 가족과 친척은 모두 얼싸안았고 다시 한 번 눈물을 터뜨렸다. 다들 나를 축하해주셨고, 합격문자는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주시는 선물 같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정말 슬펐지만, 내가 퇴원하고 건강해져서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자주 찾아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큰 손자가 병원에 누워있으면 그것도 참 큰 슬픔이고 마음의 짐이셨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혼자 계신 할머니를 매달 찾아뵌다. 할머니께서 연세가 있으셔서 멀리는 못 가시지만,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어린 아이처럼 재밌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씀드린다. 할머니가 최대한 건강하고 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각난 김에 할머니께 전화 한 통 드려봐야겠다.      


* 글에 담지 못한 이야기와 정보는 인스타그램에 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instagram.com/ihave.tolive      

매거진의 이전글 47. 암환자도 취업할 수 있을까?(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