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리바라기 Jul 01. 2024

책들의 시간 92.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 "우리도 그렇게 만났잖니"_하정 지음_좋은 여름

  재밌게 잘 읽었다. 이 책이 왜 읽고 싶었을까? 그 어떤 배경지식도 없었지만, 책 표지 사진에 대한 이끌림이 컸다. 은발의 할머니가 주인공이겠거니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제목,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였기 때문이었고, 강렬한 빨강의 책이 재미있기도 했다. 읽으면서 더 좋았다. 또 한 번 선물처럼 아주 재밌는 책을 발견한 기분. 이렇게 재밌는 책을 읽을 때면 자주 책을 덮는다. 아껴 읽고 싶은 마음에.    

  

  책은 ‘사진 에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외국 봉사 후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만난 ‘쥴리’, 그리고 쥴리의 제안으로 묵게 된 쥴리 집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쥴리의 엄마 ‘아네뜨’와의 만남. 그것이 이 책 기획의 출발점이었다. 귀여운 할머니, 아네뜨의 일상을 찍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한 달간 덴마크 아네뜨 집에 머물면서 아네뜨가 사용하는 일상 소품, 삶을 소개하는 일이 되었고, 독립출판을 거쳐 이렇게 책으로까지 출간되게 된 것이다. 첫 출간부터 5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이 ‘다섯 살 에디션’ 책을 읽게 된 것이었다. 읽으면서 아네뜨의 일상을 보는 것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아네뜨의 아버지 ‘어위’로부터 이어오는 역사와 전통이 서린 물건의 소품이 어찌나 예쁘고 좋던지, 읽는 내내 참 좋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소중한 소품을 통해 추억을 발견하는 일,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타인과의 공감을 통해 새로운 만남이 이어지는 일에 대한 부분에서 눈물이 핑 돌만큼의 감동도 있었다.      


1.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은 마음. 


 「미래상」

 별 관심도 없던 낯선 나라 덴마크, 일정에 없던 어느 시골 마을, 며칠 전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의 집, 샛노란 조명이 길게 늘어뜨려진 거실에서, 회색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선망하거나 동경하던 것을 드디어 발견했을 때의 기분도 아니고, 어떤 영감을 얻어 저렇게 되고 싶다는 결심을 더욱 아니다. 그런 단어가 표준어로서 존재하는지 나중에 사전을 찾아봤을 정도로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른 단어였다. (7쪽)     

  내 나이대면 지금쯤 한창 몰아쳐 일하고 자리를 잡을 시기, 어찌 된 일인지 내 일상의 그물코는 더 성글어지는 것만 같다. 6년 전 캠프힐을 다녀온 후 확실히 그렇다. 조금 덜 완벽하게, 조금 더 열심히… 한국에 돌아온 후 회사와 가족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렇게 저렇게 살아보며 6년을 지내는 동안, ‘이래도 되는 걸까?’ 모아둔 도토리 하나 없이 겨울을 목전에 둔 다람쥐의 마음이 될 때도 왕왕 있다. 

  그럴 때면 내 인생의 도토리는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것 외엔 불안을 잠재울 방법이 없다. 때마침 이 먼 곳까지 나를 찾아온 신용카드사용내역 이메일은 애써 모른 척하고, 대신 어떤 도토리가 나의 굴에 있는지 떠올려본다. 분명 있었는데 어느덧 사라진 도토리를 추억한다. 한 알, 한 알… 마음이 벅차기도 애가 저리기도 한다. 캠퍼 천정에 도토리들이 가득 그려질 즈음, 쥴리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서머! 엄마랑 정원에서 뜨개질하고 있어. 양말 뜨기 배우지 않을래?」 (112쪽)


  늘 규칙적이어서 예상이 가능한 범위에서의 삶을 추구하는 내가 동경하는 몇 가지가 있다. 가슴 바로 위쪽의 평평한 부분에 새기는 타투, 어느 곳에서든지 언어의 부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프리 토킹, 원하는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계획 없는 여행, 낯선 여행지에서의 낯선 이와의 술자리. 이런 동경.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실천할 수 없다. 타투는 날씬해지면 새기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평생 날씬해질 일은 없을 것이고, 매해 외국어 공부를 결심하긴 하지만 실천력의 부재다. 그래서 파파고가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주 잘 안다.      


  특히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여행에 대한 계획이다. ‘MBTI’를 검사해 보면, 늘 ‘J’의 성향이 조금 더 강하다고 나오기는 하지만 사실 사회적 요구에 의한 ‘J’라고 믿고 있다. 스무 살 학교 심리학과 수업에서 검사했을 땐 ‘J’가 아니라 ‘P’였음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보면 시간 단위로 꼼꼼하게 세우지 못한다. 막연히 어디로 가자, 어디에서 자자, 그리고 하루에 이것 하나만 하자, 이렇게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외국에 가서도 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 동네를 구석구석 산책하듯 돌아다닌다. 아침 산책의 습관에 따라. 하지만 관광지를 찾아다니지도 않고 시간에 맞춰 일정을 소화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숙소에 머물며 열렬한 쉼을 누리지도 않는다. 아침 산책 후 들어가 책이나 읽다가 마실 가듯 나가 밥 먹고 걷고 들어와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행.       


  혹여 혼자 간 여행지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나에겐 정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택시 운전기사님이 말 거는 것이 싫어 택시를 타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나이며, 아침마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어떤 분이 인사를 하시기에 그 뒤 먼발치에서 그분만 보여도 길을 돌아서 가는 나이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 날이면 어김없이 체하고, 유난히 말을 많이 해야 했던 날엔 기분이 가라앉아 저녁 내내 에너지를 회복하지 못하는 나임을 잘 알기에, 이런 기획과 협업, 그리고 그 결과물, 낯선 곳에서의 관찰 그 모든 것들이 부럽고 신기했다.      


  책의 내용이 단순히 아네뜨 삶의 관찰과 사진 기록만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생각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이유는 책의 내용 설정과 편집 과정에서의 고민 덕분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에세이’가 될 수 있었다. 작가의 고민, 나이를 먹어갈수록 모아 둔 도토리 없이 겨울을 맞이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 그리고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 작가가 아네뜨를 처음 만났을 때 미래상을 떠올렸던 것과 연결되는 마음이다. 책의 제목이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도,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사실 낯가림도 심하고 사람들과도 잘 소통하지 못하지만, 아네뜨처럼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노년에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뭔가를 기록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물론 체력이 그걸 허락해야 가능한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전히 걸을 것이고, 또 철봉에도 매달릴 것이고, 양파즙도 먹을 것이다. 푸훗, 웃음이 난다. 상상만으로.    

  

2. 일상의 소품을 대하는 일련의 태도. 


  이 집에서는 새것이 들어오면서 이유 없이 헌 것을 쫓아내지 않는다. 버려지는 것은 최소한으로, 쓸 수 있는 부분은 꼭 업사이클링하는 것이 아네뜨의 방식이다. 물건의 쓸모는 여러 가지로 변신하여 아네뜨의 삶 안에서 돌고 돈다. 새 캔버스 가방을 들 때마다 아네뜨는 정원에서 뜨개질을 하던 시간, 소파에서 보낸 여러 번의 크리스마스를 반추할 것이다. 그는 몇 년 후 이 가방에 질린다 해도 패브릭이며 부속품을 그냥 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39쪽)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해옥이 가득한 집 – 2023년 2월 호 북유럽 디저트 편>에 쥴리와 행운의 주전자가 초대되어 사진촬영을 했다. 촬영을 수월히 마치고 덴마크 디저트로 티타임을 가졌다. 매거진 에디터와 요리연구가 선생님이 기사에 녹여낼 여러 질문을 쥴리에게 던졌다. 북유럽 사람들의 여유로움, 느긋함이 디저트와 티타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등등. 그러다가 선생님이 “그 나라 사람들은 디저트를 참 단순하게 만들더군요. 재료도 과정도!”라고 감탄하자 쥴 리가 답했다. 

  “맞아요. 가가이 있는 재료로 아주 간단히 만들어요. 그래야 사람들과 디저트를 즐길 시간이 생기니까요.”

  나는 쥴리의 이 대답이 흐른 단 몇 초를 그날의 가장 길고 가장 진한 순간으로 기억한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않는 것’

  그래서 어떤 지점은 시원하게 지나쳐 주고, 어떤 지점을 꼭 챙겨 붙들어야 하는지 알고 사는 것. 쥴리와 아네뜨가 그동안 내게 보여준 일련의 태도가 모두 그랬다. (339쪽)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흥미로웠던 장면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식기, 인형, 카드, 기록물 등의 사진과 그것을 대하는 아네뜨 가족의 태도였다. 아네뜨의 아버지 어윈은 산업 디자이너였으며, 스테인리스 주방용품, 유리 제품 등을 만들었고, 심지어 전시 포스터 공모전에도 당선된 이력이 있으신 분이다. '어위'의 아버지는 은 제품 공장을 운영하였고, 그런 가계도와 더불어 아네뜨는 은제품을 만드는 사람이었으며, 손재주가 많아 뜨개질도, 자수도 잘하였다. 식물과 다양한 소품이 함께하는 아네뜨의 집이 참 좋았다.

      

  소품이 소품의 역할을 다 하는 것, 그리고 그 역할이 끝나면 다시 다른 어떤 소품의 일부가 되는 것, 업사이클링. 아네트가 소품을 대하는 태도였다. 살면서 어떤 지점은 시원하게 넘어가 주고 어떤 지점은 챙겨 붙들어야 하는지, 그걸 기억하고 구분하는 일이 참 중요하구나, 싶었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아네뜨와 쥴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태도였다. 참 좋다. 그런 삶의 태도를 본받고 싶어졌다. 책을 다 읽고.     

 

3. 정리     


  마음에 드는 가방을 하나 얻었다. 겨울에 들고 다니는 가방은 마음에 쏙 드는 것으로 선물 받았었다. 여름이 되고 더 이상 그 가방을 들고 다닐 수 없어 다른 가방이 필요했는데, 몇 번 내 돈으로 샀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정말 마음에 쏙 드는 가방을 딸에게서 얻었다. 어찌나 가방이 마음에 들던지 들고 다니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마음에 맞는 물건을 만나는 것이 이리 소소하지만 긴 행복을 준다.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소비에 익숙하여, 나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고 이것저것 사들이는 나의 모습을 반성했다. 그리고 하나의 물건을 오래 사용하지 못하는 내 모습도 반성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소품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당장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냥 버리는 일도 많았고, 이내 비슷한 용도의 물건이 필요해 다시 사는 일도 많았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있는 것에 대한 애정, 그리고 활용.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사부작사부작 옷도 엄마만의 스타일로 고쳐 입으시고, 가방에 소품 하나도 잘 어울리게 함께 사용하시는 엄마, 엄마의 그 마음을 나도 본받아야겠다. '어위'의 삶이 아네뜨로 이어지고, 쥴리에게로 이어진 것처럼.      


[이야기 나눠 보기]

1) 주변에 닮고 싶은 할머니가 있다면 누구인지 소개해봅시다. 어떤 모습이 마음에 와닿았으며, 어떤 모습을 닮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또는 물려받은 물건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그 물건에 대한 마음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작가의 이전글 책들의 시간 91. 초록을 입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