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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해 Nov 18. 2023

겨울이 와서 춥다고만 생각했는데


겨울이 와서 춥다고만 생각했는데 좋은 점이 꽤 있었다. (평소 물도 잘 안 마시는데) 따뜻한 차를 우려먹게 된다는 점, 예쁜 코트와 목도리를 착용할 수 있다는 점, 곳곳에서 캐럴을 들을 수 있다는 점. 주위를 둘러보니 꽤나 많은 행복이 이곳저곳에 포진되어 있구나. 매년 오는 겨울인데 새삼스럽다.




며칠 전 아직 전기장판도 없는 내 방 이불 안에 누워 책을 읽는데 행복하다고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진득한 감정. 그동안 불안함과 괴로움에 뒤섞여 내 마음과 몸을 가누지 못해 글을 한 자도 쓸 수가 없었는데 나에게는 너무 뜬금없이 이러한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그때 무탈한 일상, 이 다섯 글자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짜릿하고 새롭고 나를 흥분시켜 줄 것들에 목을 메고 찾아다녔던 과거. 내년이면 삼십대로 접어들어서일까. 이제는 아무 자극이 없는 그저 무탈한 이 시간이 내겐 기쁨이 된 걸까. 짜릿한 감정 뒤엔 늘 공허가 따라붙었고, 흥분 뒤에는 실망이 쫓아다녔다. 인간은 어느 것 하나로 쉬이 만족할 수 없기에 내게 행복은 쫓으면 쫓을수록 가까워지는 것 같지만 또다시 다른 꿈을 향해 멀어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그런 신기루를 쫓는 삶에 덧없음을 느꼈다. 언제 나도 저 에세이에 나오는 사람처럼 아무런 평온한 일상에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흉내만 겨우 내던 중 어느새 나도 모르게 미약하나마 그들처럼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손수 차려먹고(아직 너무 어려운 부분), 후식으로 차를 마시고 자기 전에 책을 읽으며 필사를 한다. 행복은 이렇게 쉽게도 찾아올 수 있구나. 나에게도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구나. 안도감이 든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열쇠를 얻은 기분이었다.


좌절했던 순간들도 똑똑히 기억한다. 꾸준함이란 거리가 멀군. 난 역시 안 돼. 글러 먹었어. 왜 이렇게 게으른 걸까. 하지만 그것들을 놓지 않고 아주 조금씩 조금씩 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삶에 스며들었다. 나처럼 게으르고 대충대충에 불성실한 사람도, 비록 느리더라도 분명히 성취는 있구나.





일상이 안정되고 일상 안에서 느끼는 기쁨이 늘어날수록, 변수가 많고 고생길이 훤한 배낭여행이 점점 두려워진다. (그러면 안 가면 되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백발을 흩날리며 배낭여행을 하는 할머니로 늙는 게 내 소원이다). 과거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 그때는 나의 일상에서 도피처가 필요했다. 여행은 충분히 나의 피난처가 되어주었고 기꺼이 나는 여행길에 내 몸을 맡겼다. 어떤 고생도, 위험도 나는 힘들지 않았다. 그저 지독하고 지난한 현실에서 발을 뗀 것만으로도 내게 위안이었고 숨 쉬는 길이었다.


이제는 현실에서 발을 붙이고 사는 법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느낄만한 즐거움과 행복도 차츰 알아가는 중이다. 기운을 내어 요리를 하고 더러워진 집을 조금씩 치우고 너무 밀리지 않게 빨래를 돌린다. 자질구레한 일들. 내 삶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일들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건 지친 나를 돌보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이렇게 삶의 비밀들을 조용히 깨우쳐간다.





지금도 나는 현실에서 자주 불안에 휩싸이고 일도 관계도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면 저 땅 끝으로 곤두박질친다. 5평 원룸에 숨어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다. 바닥과 한 몸이 되어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모든 것을 미루고 모든 것을 회피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회복 탄력성을 길러야지, 내가 언제 기분이 이랬더라, 나는 어떤 것에 취약하구나, 를 점점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을 나의 인생을 조금 더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둘러싼 상황은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나 자신은, 나를 운영하는 나를 좀 더 잘 길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느리고 서툴고 부족하다.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을 번갈아가며 스스로를 지치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고 소중해서 내 삶을 포기할 수 없다. 남들보다 빠르진 않아도, 남들보다 세련되진 못해도, 남들보다 꼼꼼하지 못해도 그저 내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간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에 닿는다. 겨울이 춥다고만 생각했는데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날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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