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의 일기 2 - 말할 수 없는 슬픔
2023년 2월 3일 금요일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동생수술이 끝나고 친구들 있는 단톡방에 상황을 알렸더니 걱정이 되었는지 친구들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병원에 혼자 있는 거냐며 괜찮냐고 걱정을 했다. 친구들은 자기가 먼저 전화를 해놓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을 깨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눈물이 났다. 그냥 폭포처럼 눈물, 콧물이 다 나왔다. 혹여나 시끄러울까 봐 화장실로 재빨리 가서 소리 내어 울었다. 갑자기 터진 나의 울음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는지 친구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이야기하다를 반복했더니 머리가 띵했다. 또 다른 친구의 전화에 똑같이 상황을 말해주고 또 울었다. 울다 지친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몇 번이고 오는 전화에 너무 많이 울어서 더 이상 울 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예상과 다르게 멈췄다고 생각했던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남들은 아직 자고 있거나 이제 일어날 시각에 나는 중환자실 문 앞 대기실 의자에 홀로 앉아 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수술 전까지만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수님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위험을 감지했다. 병원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에 최악의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겁이 났다. 나는 그렇게 말해도 내 동생은 분명 일어나는 기적을 보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울 일이 아니라고 다짐했지만 나의 생각과 다르게 자꾸 눈물이 났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듣게 될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5년 전 아빠의 죽음으로 나는 엄마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느꼈었다. 엄마가 아빠를 따라갈까 봐 항상 두려웠다. 저녁이 되면 엄마가 답답해서 잠시 바람을 쐬러 바깥에 나가는 것만으로 굉장한 걱정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나갔다가 영영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엄마가 집안으로 다시 들어온 걸 확인해야만 잠이 들었다. 가족 모두가 힘들어했고 아직까지도 그 슬픔은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아들까지 그렇게 된다면 엄마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최악의 경우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질 것만 같았다. 나에게서 이렇게 모든 걸 앗아갈 수는 없다. 아빠가 떠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겨내고 있었는데 아무리 인간은 혼자라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신이 있다면 도대체 나를 얼마나 강하게 키워내려고 이런 시련을 주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쉽게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쉽고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창조주가 문제를 만들 때 인생 난이도 조절을 실패한 게 분명하다는 의심이 다시 한번 들었다.
‘인생 난이도를 자꾸만 최상으로 만드는데 저에게 뭘 원하시는 걸까요? 얼마나 큰 걸 주려고 이런 걸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당연히 주셔야 할 거고 내 동생도 살려내야 할 겁니다. ’
나는 한낱 인간 따위라서 내게 벌어진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나와 가족들은 보란 듯이 이겨낼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내 동생을 그렇게 나약하게 기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기른 건 아니지만 20년 넘게 내 성격을 감당할 녀석이면 뇌출혈 따위에 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하루빨리 병상에서 일어날 것이다.
생각도 많아지고 울다 지쳐서 의자에서 잠깐 졸았다. 이 순간에도 잠이 온다니 나의 생체리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아침이 되었고 KTX 첫차를 탔던 엄마와 작은삼촌이 도착했다. 얼굴을 보니 서로 말하지는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밤새에 얼마나 울었는지를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이냐며 연신 한숨만 내쉬는 삼촌과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한 엄마와 나란히 앉아서 교수님을 뵙기만을 기다렸다. 수술이 어떻게 됐는지 간단하게만 알려주었고 자세한 이야기는 교수님에게 들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삼촌은 괜히 우스갯소리를 하며 기분을 달랬다.
“너 다크서클 뭐냐. 턱까지 내려왔다.”
“그렇게 심한가? 근데 그럴 수밖에 없지. 여기 좁은 의자에서 계속 이러고 있었는 걸”
“네가 고생했네.”
“그러게 말이야. 이경오 일어나면 아주 혼쭐이 나야 돼.”
“그래 엄청 혼내라.”
그렇게 어디를 갈 수도 없고 교수님을 언제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앉아 있기만을 한 시간 반쯤 지나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나는 이미 들었지만 면담실로 같이 들어갔다. 내가 젊어서 그런지 나에게는 직접적으로 결론부터 말했는데 엄마와 삼촌 앞에서는 서론이 길었다. 최대한 충격을 덜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교수님은 CT사진을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그러면 일어날 수는 있는 건가요?”
“일단 지금 상황으로는 언제 깨어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에 1차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더욱 청천벽력 같은 말이 교수님 입에서 들려왔다.
“환자분은 수술 전부터 오른쪽 동공이 전부 열려 있고 반 혼수상태였습니다. 일단 건장한 20대 성인 남성이니 그것 하나에 희망을 가지고 긴급수술을 들어간 겁니다. 일단 목숨부터 살리고 봐야 하니 수술 후에 일어날 후유증이나 장애는 미뤄두고 구명을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때 수술을 안 했으면 지금쯤은 사망했을 것입니다.”
살면서 부모가 듣지 말아야 할 큰 소식이 자식의 사망이다. 그런데 수술을 하고도 상태가 안 좋다며 당장 오늘 어떻게 될지 내일 어떻게 될지 아무 미래도 알 수 없다며 사망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를 한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미어질 이야기를 들어버린 엄마는 울지도 못하고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의사의 말을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수술을 안 했으면 사망이라니. 내가 그때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이른 아침 시간에 동생의 사망소식이 들려왔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아찔했다. 교수님은 혹시 모르니 쓰러지게 된 경위를 알아보는 것을 좋을 것이라고 했다. 영상 증거물은 시간이 지나면 찾기 힘들 수도 있으니 우선 유도관 CCTV부터 확보하라고 하였다. 그 말이 혹시 모를 죽음을 대비하라는 말같이 들려서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과거의 똑같은 실수를 또 반복하면 안 되는 걸 알기에 충격을 온전히 받아들일 새도 없이 일을 처리했다.
면담실 밖으로 나온 엄마는 씁쓸하게 앉아만 있다가 결국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옆에 들을까 봐 흐느끼지도 못하고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화장실만 들락날락거리면서 말이다.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아는 체를 할 수도 없었다. 울고 있는 엄마는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동생이 일어났을 때 곤란한 일들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미리 처리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동생폰이 열려있어서 일처리를 빠르게 할 수 있었다. 최근 통화목록과 카톡 대화를 뒤져서 체육관을 알아냈다. 삼촌은 CCTV 영상 확보를 위해 체육관에 전화를 했지만 장비의 계약기간이 끝나 영상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업체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애매한 대답만 들려왔다. 나는 최근에 동생과 자주 연락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쓰러진 당일 날 상태에 대해 확인을 했다. 또한 재학 중인 대학교에 전화를 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대리인 자격으로 휴학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문득 동생이 아르바이트한다고 했던 카페도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여 사정을 설명했다. 동생이 지내는 자취방 집주인에게도 연락을 하여 1~2달까지는 방을 놔둘 건데 상황을 보고 그 이후에 방 빼는 것이 가능한지 확인을 했다. 일단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은 재빠르게 해결했다. 밥도 안 먹고 밤을 새운 내가 안쓰러웠는지 삼촌이 뭐라도 먹자고 하며 나를 데려갔다. 엄마는 입맛이 없다며 안 먹는다고 해서 중환자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링티만 고르고 나오니 먹고 싶은 게 없냐고 그러길래 입맛이 없다고 하니 뭐라도 먹어야 한다며 고르라고 했다. 죽을 파는 곳이 있길래 죽을 시켰다. 입맛은 없는데 내 인체는 본능적으로 배고픔을 느끼고 음식을 요구하니 먹을 수밖에 없었다. 입맛이 없다면서 죽 한 그릇을 다 먹는 모습을 보고 삼촌이 입맛이 없는 것 맞냐며 놀려댔다. 그러고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굶지 말고 엄마랑 내 몸을 챙기라면서 30만 원을 건네주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동생이 수술한 날이 금요일이라서 당일날 면회가 가능했다. 코로나 때문인지 면회는 일주일에 2번 화, 금 그것도 12:00~12:20으로 20분만 가능했다. 다른 요일이었으면 당장 못 볼 수도 있었는데 아주 불효자인지 효자인 건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중환자실 면회는 1명만 들어갈 수 있어서 엄마가 들어갔다. 11시 40분쯤 되니 한산했던 중환자실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간이 되니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경호원들이 나왔다. 제일 먼저 가서 체온을 측정한 후 방문기록을 작성하고 중환자실 복도로 들어가 손을 씻는 엄마가 보였다. 그리고 보호장비를 착용하고 장갑을 끼고 맨 앞에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모든 사람들이 준비되면 12시에 맞춰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더니 삼촌이 말했다.
“너네 엄마 제일 먼저 들어가고 제일 오래 기다리네. 먼저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렇네. 다음에 올 때 참고해야겠다.”
그 어느 순간보다 짧았을 20분이 지나고 나니 엄마가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중환자실 밖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 5분 정도 늦게 나왔길래 물어보니 중환자실에 상주하고 있는 간호사가 아들 곁에 있을 시간을 조금 더 벌어준 것 같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를 해도 된다며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눈이 빠지게 기다릴 가족들을 위한 사소한 배려에 감사함을 느꼈다. 어차피 병원에 계속 있어봤자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면회도 끝이 났고 다음 면회는 화요일이다. 병원에는 마땅히 있을 공간도 없어 일단 1층에 있는 카페로 가서 삼촌이 타고 갈 기차시간을 기다렸다. 엄마는 그 사이에 수십 통의 전화를 받으며 울기를 반복했다.
카페에 앉아 있는데 남자아이가 로비에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동생이 어렸을 때가 생각이 났다. 내 동생도 저렇게 활기차게 뛰어다녔었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한숨이 나왔다. 이 소식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어떻게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 엄마, 삼촌, 나 이렇게 셋이 카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머리를 맞대어 아이디어를 냈다. 충격적인 소식에 뒷목 잡고 쓰러질 수도 있으니 일단 청심환을 미리 먹여놓고 말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수요일에 할머니집을 가야 할 일이 있다며 그때 엄마가 직접 이야기하기로 했다.
카페에 있다 보니 열차 시간이 다 되어 삼촌과는 병원 앞에서 헤어졌다. 엄마랑 나는 일단 서울에 있는 내 자취방으로 가기로 했고 토요일에는 수원에 있는 동생 자취방으로 가서 며칠을 지내기로 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환승해서 오기엔 너무 지쳐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택시 안에서는 반드시 일어날 거라는 말을 하며 애써 무겁고 슬픈 분위기를 외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한참 대화가 없다가 엄마가 슬픔을 애써 누르면서 슬며시 나에게 물었다.
“니도 어제 많이 울었지? 눈이 퉁퉁 부어있던데.”
엄마 앞에서는 일부러 더 안 울고 있었는데 새벽에 혼자 울면서 엉망이 된 내 얼굴 때문에 들켰다.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엄마의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집에 도착하니 택시비가 어마무시하다. 56000원. 이 돈이면 서울에서 부산을 갈 수 있을 텐데. 앞으로 병원비도 문제고 걱정이 태산이다. 걱정도 잠시 잠을 못 자서 정신이 몽롱했지만 나에겐 밀린 집안일이 남아있었다. 엄마는 집 정리를 하는 나를 지켜보다가 피곤했는지 바로 잠이 들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소리에 일어났다. 여기저기 전화가 올 때마다 같은 설명을 하는 것도 일이었다. 계속 오는 전화에 우는 것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똑같이 눈물은 나왔지만 점점 피곤해져서 설명은 간략해졌다. 일단 저녁은 해결해야 돼서 떡볶이를 시켰다. 입만 조금 대다가 그만 먹겠다는 엄마를 억지로 먹였다. 먹어야 힘을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사촌언니가 전화가 와서 동생은 지금 만날 수가 없으니 우리라도 보고 가겠다며 내일 수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모든 전화가 마무리되고 나는 먼저 침대에 누웠다. 엄마는 잠이 안 온다며 맥주를 찾았다. 옆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는 엄마를 두고 적당히 마시고 자라는 말과 함께 먼저 잠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잠이 든 후에도 한참을 깨어있다가 내 옆에 누웠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한 치 앞도 모르기에 더 힘들 수도 있다.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장기전이 될 수도 있지만 오직 버티고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오늘 하루는 유달리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