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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도시락

낭만 없는 남편

by 헬렌


도시락 하면 생각나는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남편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랴, 영어로 수업 들으랴... 정신없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남편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오전에 수업이 끝나도 점심에 집에 오지 않고 도서실에서 공부하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을 때, 3,4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옵니다.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나면 별 다른 일이 없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무력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는 시간입니다.

운전을 할 수없으니 나갈 수도 없습니다.

우유 하나 사려해도 남편을 기다려야 합니다.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집안에 갇혀 아무 할 일없이 무기력하게 지내는 일상을 벗어나려 궁리를 하다

남편의 도시락을 싸다 주겠다는 야심한 결심을 합니다.

차도 없는데 말입니다.

도시락을 싸 온 제 정성에 남편이 감동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할 일이 생기니 갑자기 힘이 쏟았습니다.

먼저 냉장에 있는 재료로 김밥을 싸고 고구마도 삶았습니다.

물도 끓여 보온병에 넣고 커피를 안 마시는 남편을 위해 녹차와 코코아도 챙기고 과일도 깎아 밀폐용기에 담았습니다.

피크닉 바구니에 정성스럽게 담아 집을 나섰습니다.

학교 가족기숙사에 살았지만 남편이 있는 강의실까지 걷자니 짧은 거리가 아닙니다.

도시락을 싼 바구니의 무게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따스한 봄날의 햇살은 남편과 피크닉같은 한때를 보낼 상상으로 바구니의 무게를 잊게 했습니다.

30분을 걸어 남편의 강의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카페테리아가 있는 로비에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반가워하며 도시락까지 싸 온 저를 기특하게 여겨주길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저와 마주치고도 반가워하지도, 도시락까지 싸왔다는 말에도 감동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걸어왔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는

“나 집에 가려고 했어...”

지금 집에 갈 건데 무엇하러 왔냐는 말입니다.

“이왕 싸가지고 온 도시락이니 여기서 먹고 가요”

“지금 집에 가서 가져 올 물건이 있어...”

도시락 싸 온 나는 염두에도 없고 집에 가자는 이야기입니다.

“햇살도 좋은데 잔디나 밴치에서 이 도시락 먹고 가면 안 돼요?”

“집에 가서 편하게 먹지...”

“.......

집 두고 왜 밖에서 밥 먹냐는 얘깁니다.

아니 피크닉 와서 공원이나 밴치에서 도시락 먹은 사람들은 집이 없어서 밖에서 밥 먹습니까?

남편의 낭만 없음에 짜증이 납니다.

옆에 있던 윤전도사님께 푸념해 보지만 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정성 들여 싸 온 도시락을 다시 집으로 가져가게 한 남편이 이해가 안 됩니다.


‘다시는 내가 도시락 싸나 봐라!’.



하지만 그 후에도 얼마나 많이 도시락을 만들었는지...

지금도 도시락 하면 그때의 서운함이 아픔으로 되살아 납니다.

이 낭만 없는 남편 어찌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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