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요소 자체보다는 전체를 이루는 요소들의 조화로운 관계에서 나온다...미학적 완성은 조각 자체가 아니라 조각들 사이의 대화로 얻을 수 있다."
- 매튜 프레더릭,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中
언젠가 책에서 만난 이후로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으로 삼고 있는 문장이다.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이루는 작은 요소들로 나눌 수가 있다. 비단 눈으로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듣고 만지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 또한 그렇다. 아름다운 전체로 인식했던 것도 뜯어 놓고 보니 생각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별 볼일 없던 전체의 요소 요소가 이루고 있던 절묘한 균형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아가, 그 요소들을 파헤치는 작업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마저도 고민하고, 관찰하고, 탐구하는 여러 과정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고보면 아름다운 것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럼에도 일상에는 늘 아름다움이 부족하다. 언제부턴가 '일상' 이라는 말이 '여유'라는 말의 반대말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일까. 가끔 마주하는 아름다움조차 알아보기가 어렵거니와, 알아본다 해도 그것을 찬찬히 음미하기가 쉽지 않다. 조각들 사이의 대화는 커녕 너무 많은 전체들을 겪어내느라 그 조각들에까지 신경을 쓸 힘이 없다. 그래서 정작 손에 닿은, 눈에 비친, 귀에 담은, 입에 머금은 아름다움을 그 ‘아름답다’는 감상으로만 두고 넘어가 버리고 만다. 이 '아름답다'는 말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그 조각들의 대화에 귀 기울일 기회를 놓치게 한다. 그러다보니 아름다운 것은 다른 아름다운 것으로 대체된다. 그러고는 아름다웠던 것, 혹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기 쉽다. '미(美)'의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전체로만 보는 습관은 때로는 슬프기까지 하다. 각자의 일상이 그가 살아가는 인생의 조각으로서 지닌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이따금 배제해버리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못한 인생이라고 여기는 이의 일상은, 그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만다. 더 나아가, 그 일상을 이루고 있는 말과 표정, 생각과 행동 또한 그저 그 순간을 어떻게든 채워내는 데 그친다. 사실은 그것들 하나 하나가 결국 전체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미 스스로가 생각하고 정해버린 '아름답지 못한' 전체의 모습만을 보다보니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아름답지는 못하다고 여기더라도, 혹은 앞으로의 인생도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고 좌절하더라도, 조각으로서의 일상들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전히 살아있는 한 인생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하루 하루 꾸준히 일상을 쌓아내다가, 미지의 순간에 마지막 조각으로서의 일상을 맨 위에 올려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의 인생이 된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일상들은 말과 표정, 생각과 행동의 모습을 한 찰나들로 겹쳐져 있다. 씁쓸했던 과거 조차도 현재에 와서 웃음을 짓게 만들고, 아득하기만 했던 훗날이 어느새 지금이 되어 환호하기도 한다. 이런 반짝이는 순간에도 아름다움은 충분히 깃들어있다.
그렇기에 결국 인생은, 생각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2021년 11월